지난 2일부터 <중앙일보>에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77)의 글이 실리고 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란 제목의 연재에서 박 회장은 “우리 후손이 20세기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자기 인생의 상징인 ‘철(鐵)’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회고하고 있다.

그 날치 신문을 받아드는 순간, 머리 속으론 어린 시절 사회교과서에서 봤음직한 또는 으레 때가 되면 신문에 실리는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뜨거운 여름에도 우주복 같은 작업복을 입고 섭씨 1,300도나 되는 용광로 쇳물 앞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 흔히 ‘더위야 물렀거라’는 류의 캡션과 함께 실리는 이 사진을 보며 우리는 국가기간산업의 표상으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기억해야 했고, 노동자들을 ‘산업역군’,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고 이해해야 했다.

하지만 ‘산업역군’들은 포스코의 철저한 노무통제 아래 ‘병아리’(작업복 색깔이 짙은 노란색이라 회사에 순종적인 포철 직원들을 하대해서 부르는 말)들로 ‘육성’돼야 했고, 90년대 초반 참다 못한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결성했으나 해고와 회유 속에 하나둘 포스코를 떠나거나 말 잘 듣는 ‘병아리’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철강대국’ 목표에 반하는 행위들에 박 회장은 가차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포스코 5년 근무를 조건으로 무상교육을 실시했던 포스코재단의 한 공고 출신 노동자는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의무복무기간 5년을 2~3달 앞두고 해고돼 군대에 끌려가야 했고, 같은 재단의 인문계 고교에서는 80년대말 학생회를 직선제로 바꾸기 위해 학생 대표들이 회의하던 장소를 박 회장이 급습, 다짜고짜 뺨을 때렸고, 심지어 그 학생들의 부모 가운데 포스코 직원들에게 감봉 등의 징계를 했다는 후문이다.

그런 그는 경영일선을 떠나 집권여당의 대표와 국무총리를 지냈고, 지금은 고향인 부산 기장 바닷가에 지은 아담한 스틸하우스에서 행복한 황혼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철의 노무관리’ 기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는 올 상반기에만 1조6천억원의 순이익을 올렸음에도 77% 선에서 공사를 발주하고 있고, 공사실행 단가도 대폭 삭감해 설계가의 46%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평균 46살 되는 건설노동자들은 연봉 1,700만원 받으며 쇳가루가 땀처럼 온 몸을 적실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런 가운데 포스코는 지난 5월 조합원 20여명 규모의 초미니노조와 임금동결을 선언해 노동계 임투에 찬물을 끼얹는 여론몰이를 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당시 스톡옵션과 성과급으로 정규직에 보상했다는 사실은 알리지도 않은 채 “비정규직, 중소기업과의 임금격차 해소를 위해 임금동결을 한다. 협력업체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으니 대박터뜨린 여론몰이였던 셈이다.

하지만 광양과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는 건설 하청노동자들은 지금, 일당 11만5천원으로 인상, 다단계 하도급 최저낙찰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폭염 속에서 거의 한 달째 파업을 하고 있다. 발주처로 실권을 쥐고 있는 포스코는 그러나 어떠한 답변도 없고 “단종업체(하청업체) 사장들을 모아 노조 요구가 수용될 수 있도록 적극 논의해 보겠다”는 포스코 계약담당 상무와 설비구매담당 상무의 지난달 27일 약속도 온데간데 없다.

그래, 철이 없으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철을 만드는 노동자와 철을 만들 수 있도록 공장을 설립하고 유지보수하는 노동자들이 없다면 박 회장의 바람과 달리 쇳물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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