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피복노조원 어제와 오늘::) 지난달 19일 민주노동당의 권영길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당선자 10명이 한 할머니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경기도 남양주 시 모란공원의 고 전태일씨 묘소 앞에서였다. 재야의 노동운동가 에서 제도권의 의원이 된 그들이 감격에 겨워 껴안은 이는 전씨 의 어머니 이소선씨였다.

TV뉴스를 통해 이 장면을 누구보다 느껍게 지켜본 이들은 지난 7 0년대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했던 전씨의 동료와 후 배들이었다. 이들은 어린 여공들의 일을 대신 해 주고 차비로 풀 빵을 사 먹이느라 스스로는 12km의 출퇴근 길을 걸어다녔던 ‘전 태일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영세업체 노동자들의 사?榻牟?삶을 요구하며 제 몸을 불태운 ‘전태일의 절규’를 노동 자 전체의 외침으로 만들기 위해 젊은 시절을 아낌없이 내던졌다 .

2일 청계천 전태일기념관 건립을 위한 걷기대회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전태일의 사랑과 희생’이 오늘 재야 의 노동운동가들을 여의도에 입성시킨 밑거름이 됐다고. ‘일하 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는 희망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는 이들은 또 말했다. 이 희망을 오늘의 현실에서 미래로 이어가 기 위해선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문제를 모두가 내 일처럼 여겨야 한다고. 정부와 사용자는 더 성의있는 태도를 보여야 하고, 무 엇보다 대기업 노조가 자신의 권리를 나눠야 한다고.

◈전태일의 친구로서〓1970년 평화시장 의류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22세 청년 이승철(56·사진)씨는 1970년 평화시장 의류공 장에서 청년 재단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해 9월 같은 일을 하는 친구 최종인씨의 소개로 역시 또 한 공장의 재단사였던 23 세의 전태일씨를 만났다. 여성 미싱사 밑에 ‘시다’와 ‘보조’ 두 단계가 있던 시절인 만큼 남성 재단사는 ‘끗발’이 있는 편 이었다. 그러나 최씨와 이씨는 전씨를 만난 후 자기의 끗발을 접 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 15명과 삼동회를 만들어 어설프게나마 노동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누이동생처럼 어린 시다들이 각 성제를 먹어가며 뼈빠지게 일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 을 직접 눈으로 봐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전씨의 분신 이후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에 70년대를 몽땅 바친 것은 숙명이었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유신정권의 공권력 앞에서 여리디여린 여공들을 다독여가며 노조 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노조 간부들은 가족들의 생계와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늘 허덕여야 했다.

최씨는 79년 집안의 생계를 위해 의류 판매에 나서야 했고, 이후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현장에서 멀어졌다. 이씨는 81년 군사정권 에 의해 노조가 해산되자 이소선씨 등과 함께 저항 농성을 벌이 다가 구속됐고, 출감 후 평화시장에서 2년간 재단사로 일하다가 84년에 지퍼 장사를 시작했다. “6세와 4세 두 아이를 부양해야 했는데, 계급의식 있는 투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계속 하기는 버거웠다”고 이씨는 말했다.

그리고 20여년…, 세상은 급변했고, 청계피복노조는 서울의류노 조로 옷을 갈아입었다. 70년대의 동료들은 그 사이 자영업자로, 가정주부로 변신해 중·장년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전태일의 정신’을 잊을 수 없어 80년대 초반에 ‘청우회’라 는 모임을 만들었다. 80~90년대 노조활동을 했던 후배들이 계속 들어와 현재 전국에 1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청우회는 매년 1 1월13일 전태일 열사 추도식때 모임을 갖고 지난 96년에 만들어 진 전태일기념사업회의 각종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청우회 회장 을 맡고 있는 최씨는 “그 당시 동료들을 만나면 눈물겹게 반갑 다. 지금은 의류판매업체 사장으로 사용자 입장이지만, 그때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 지퍼회사의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씨도 기념사업회의 이 사로서 기념관 건립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는 중이다. “ 7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면 빨갱이라고 탄압을 받았어요. 지금은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니 세상이 좋아졌지요. 그런데 예전 엔 노동자 모두가 어려웠기 때문에 단결이 잘 됐어요. 지금은 정 규-비정규직 차이 때문에 노동자들끼리도 갈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비쳐 안타깝습니다. 정규직 대기업 노조가 대우를 양보해 비정 규직 처우를 높여줘야 해요. 그것이 노동자의 희망을 지키는 길 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후배 여성 노동자로서〓70년 평화시장의 한 공장 미싱사였 던박명옥(62·사진)씨는70년 평화시장의 한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던 28세 처녀였다. 그는 전태일씨의 분신 소식을 들은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보 다 어린 사람이 했다는 생각때문이었어요. 열일곱살 때 시다로 들어와 그때까지 기계처럼 죽어라고 일만 했기 때문에 전태일씨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지요.” 전씨의 친구들과 이소선씨를 만난 후 박씨는 청계피복노조의 ‘ 언니’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와 남동 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미싱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예순이 넘은 지금에도 일을 한다는 그는 “ 노동자 전체의 생활은 나아졌지 만, 어려운 사람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대부분 지하실에 있는 의 류공장만 하더라도 예전엔 사장이 직접 운영했는데, 지금은 하청 업체가 많으니 상황이 더 나빠졌어요”라고 생산현장의 현실을 전했다.

12세에 평화시장의 미싱 시다로 들어왔던 신순애(51)씨는 그 시 절을 되뇌면 언제나 목이 멘다고 했다. ‘박명옥 언니’의 권유 로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했던 그는 활동이 미약했다며 인터뷰를 계속 선배들에게 떠넘겼고, 2일 걷기대회에도 집안 사정 때문에 불참했으나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전태일의 정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내일여성센터에서 청 소년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탈북자 후원시설인 하나원과 소년 원, 장애인 시설의 인기 강사이기도 하다. 작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올해는 대입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그는 “내가 소년원에 가면 박사선생님들보다 더 환영을 받는다. 배운 게 없 어서 늘 목이 말랐던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기 때문”이라며 쑥 스럽게 웃었다.

그 역시 청우회 선배들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요즘 대기업 노조 가 이기주의에 함몰돼 있다고 비판했다.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월급을 반으로 깎더라도 모두 함께 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이게 전태일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을 오늘 에 살려야 비정규 노동자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해요.” 이들이 대기업노조를 비판한 것은 단병호 당선자의 주장처럼 “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과 휴일에 쉬지 않고 일하는 대 기업 공장노동자의 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거나 이수호 민 주노총 위원장의 지적처럼 “노동자의 고통을 노동자에게 전가하 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유신 정권 시절에 노동운동을 했던 시각으로 오늘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다 짚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 시다들의 여린 손끝이 애처로워 그들과 더불어 일을 나누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 풀빵을 샀던 젊은 재 단사 전태일의 사랑이 오늘에도 이어져야 이 나라의 노동현장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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