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국’ 프랑스가 또 한번 망신을 당하게 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유럽 최대의 연극제인 아비뇽 축제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난해 6월 라파랭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심각한 재정 적자를 이유로 문화예술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실업수당 삭감을 시도했다. 예술가, 조명·음향기술자 등 예술분야 비정규직 노조는 이에 반발, 곧 전국적 총파업에 돌입하는 것으로 맞섰다. 아비뇽 축제가 열리는 7월, 예정된 개막일을 넘기고도 공연을 해야 할 노동자들은 파업을 풀지 않았다. 장 자크 아야공 문화부 장관은 개막을 하루 앞두고 법개정안 시행을 내년으로 연기하겠다고 밝히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결국 축제는 열리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이 문화예술 비정규노조가 실업수당 삭감 철회를 주장하며 또 다시 파업을 선언했다. 총파업 선언 과정도 한 편의 연극 같다. 1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몰리에르 연극 시상식 도중 시상식 기술지원을 담당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이크를 끄고 무대 위로 올라가 시상식을 중단시켰다. 당초 예상됐던 생방송 중계도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20일 노조는 “5월과 7월에 있을 칸 영화제와 아비뇽 축제 지원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본격적인 예술행사와 축제기간을 앞두고 프랑스 정부와 문화예술 비정규직노조의 날카로운 대립이 재연될 예정이다.

몰리에르 연극상 시상식 도중 파업 선언

프랑스에서는 여름이면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들이 집중적으로 열린다. 행사 기간이면 해당 도시는 국내외 관광객들로 넘쳐나서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게 된다. 축제가 열리는 한 달 동안 식당 호텔·관광 부문의 연간 총수입의 40%가 발생한다. 그러나 축제가 열리지 못한 작년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연극제가 취소된 남부 아비뇽의 특급호텔은 예약건수가 지난해의 절반에 불과했는데 이 행사 한 건을 취소함으로써 발생한 순 손실액만 250만 유로(약 33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에서 예술은 작품성 뿐만 아니라 막대한 관광 수익을 보장하는 국가의 주요한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문화예술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파급력은 그야말로 막강한 것이다. 문화예술 분야의 선진국가로 ‘문화행정’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프랑스 정부가 왜 이처럼 문화예술 노동자들과 가파르게 대립하게 됐을까?

프랑스 정부는 그동안 공연이 없는 기간 실업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계 비정규 노동자들에 안정적 수입을 지원하기 위해 ‘엥떼르미땅’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혜택을 부여해 왔다.

일반 노동자들이 연간 606시간을 노동하면 매달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데 비해, 공연 예술 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07시간을 노동하면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일반직 실업수당이 하루 평균 45유로(약 5만9000원)인 반면, 문화 예술 분야 실업수당은 하루 평균 122.55유로(약 16만원)에 달한다.

법시행 앞둔 우파 정부와의 힘겨루기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의 우파 정부는 지난해 연금법을 개정하면서 여론과 예술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실업급여 수급을 위한 의무노동시간을 15일~1개월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2002년 한 해 동안 발생한 8억3000만 유로(약 1조800억원)의 재정 적자를 이유로 근로시간 충족요건을 강화하고 실업수당 혜택 일수는 줄이기로 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노조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개정안은 지난해 7월 의회를 통과했으며 이에 대해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지는 지난 2월25자에 ‘라파랭과 문화계 이혼하다’라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게재하고 “개혁의 일환이라고는 하지만 문화예산의 삭감은 결국 문화 창달을 해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 노조가 다시 총파업을 선언함에 따라 개정된 실업수당 지급제도 시행을 앞두고 본격적인 축제기간인 5~7월 사이 정부와 문화예술 비정규직노조가 또한번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해를 넘겨 지속되고 있는 프랑스의 문화예술계 노-정 분쟁이 오히려 부러울 따름이다. 2월 정부가 발표한 ‘2003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예술인 1,947명 가운데 30.9%가 창작활동과 관련한 수입이 전혀 없었고, 월수입 20만원 이하가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문화예술 노동자들이 극빈자 수준의 생활조건에 놓여 있다.

프랑스 정부가 기초예술을 육성하기 위해 예술 노동자들에게 최소 생계비를 지원하는 것과 또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 막강한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전국적 총파업으로 우파 정부의 법개정에 맞설 수 있다는 것도 문화예술계 산별노조 기반이 취약한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란 기자(eggs95@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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