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홍콩 영화 ‘태극권’에서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대사다. 주인공 이연걸은 손바닥으로 항아리에 담긴 물을 빙빙 돌려 그 부드러운 물살의 힘으로 ‘견고’한 항아리를 깨버린다.

지난 2일 서울시청 부근 성공회 대성당에는 박정희 군부독재를 무너뜨렸던 ‘부드러운 힘’, 여성노동자들이 하나 둘 모였다. 공장 안에서는 ‘3번 시다’로, 또 밖에서는 ‘공순이’로 불렸던 그들이 전태일의 동생이자 또 한 명의 여성노동자였던 전순옥의 박사학위(영국 워릭대) 논문이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라는 우리말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을 두고 노동운동의 산증인 김금수는 “하층민을 뜻하는 시다(아래 하?下)들이 착취와 탄압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희망과 신뢰, 사랑의 노래(투쟁)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한강>의 작가 조정래는 “<한강>을 쓸 당시 취재차 만났던 노동운동가들이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아 왜 그럴까 의문이었다”며 “기회가 되면 이 책을 바탕으로 소설 내용을 개작하고 싶다”고 극찬했다. 그는 이 책이 여성노동자들의 망각되고 암장된 노동과 투쟁을 되살려 내면서 경제성장의 기적이 ‘박정희’의 신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도 ‘남성’ 중심 연구자들의 편견이 침투, 유포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저자인 전순옥은 내내 “부끄럽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논문이 영어로 쓰여져 정작 주인공들이 읽지 못해 아쉬웠는데, 한글판이 출판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씨가 다시 권력을 쥐겠다고 나서는 상황에 대해 암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 동시에 독재정권 치하에서 배곯아서 또는 힘들어서, 병들어서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남아 그 딸과 마주 서 있다.” 눈물을 훔치느라, 숨을 고르느라, 잠시잠시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던 전순옥과 ‘언니들’은 또 그렇게 ‘시다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이정희 기자(goforit@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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