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경제의 집중’이라는 옛 경구를 무색하게 만드는 탄핵 정국이다. 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대통령이 다시 ‘정상인간’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당신의 삶은 행복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특히 신용불량자들의 삶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정부가 탄핵안 가결 이틀 전인 3월10일 발표한 ‘배드뱅크’ 설립을 뼈대로 한 신용불량자 구제대책에 대해 ‘배째라’ 식의 도덕적 해이(모럴헤저드)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드뱅크는 여러 금융기관에 빚을 지고 있는 다중 신용불량자의 연체채권을 한데 모아 장기에 걸쳐 나눠 갚도록 하는 특수목적회사를 말한다. 초기에 필요한 배드뱅크의 자금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캄코)가 채권을 발행해 마련하는 5,000억원으로 충당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빚을 갚을 의지가 있는 다중채무 신용불량자로부터 대출신청을 받아 장기저리 분할상환 조건으로 대출을 하되, 먼저 원금의 3%를 갚으면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벗게 해준다는 것이다. 배드뱅크는 신용불량자가 달마다 내는 불입금으로 금융기관의 돈을 갚게 된다. 분할상환 기간은 최장 8년으로 돼 있다. 여기서 배드뱅크가 대출신청을 하는 신용불량자가 상환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조중동의 ‘배드뱅크’ 때리기… 총선용 조급책?

그런데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가 한풀 꺾인 뒤인 지난 3월19일부터 언론의 ‘배드뱅크’ 때리기가 시작됐다. 역시 <조선일보>가 포문을 열었다. 19일치 사설 ‘농가부채도 원금 탕감은 하지 않았다’에서. “‘배드뱅크’ 대상자가 1~2년간 빚을 꾸준히 갚으면 남은 원금 일부를 감해주는 것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다. 성실히 빚을 갚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연체 빚을 성실하게 갚고 있는 사람들만 바보로 만든다는 점에서 원칙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덧붙인다. “180만명의 신용불량자를 총선의 표로 보았기 때문에 이런 조급한 대책이 나왔을 것이라는 짐작이 더 그럴 듯한 것이다.”

배드뱅크 대책을 총선용 표 획득 차원의 정책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다. “빚 안 갚고 버티면 된다”라는 자극적인 제목 아래 ‘배드뱅크가 배드맨 양산’이라는 소제목까지 달린 19일치 B1면 머릿기사는 한 시중은행장의 말을 빌어 “개별 금융회사에 맡겨뒀으면 차차 해결됐을 신용불량자 처리에 정부가 조급증을 보이면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고 질타했다. 정부는 가만히 손놓고 앉아 있으라는 얘기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빚 안 깎아주면 안 갚겠다”는 제목의 E1면 머릿기사를 실었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최근 배드뱅크 등 신용불량자 지원 방안을 잇따라 발표하자 빚을 갚지 않겠다는 ‘배짱 채무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융계 관계자의 말을 빌어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갚지 않은 사람과 빚을 갚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는 공자 말씀을 펼친다. 빚 갚을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과 빚 갚을 의지와 능력이 없는 사람을 구분하자는 얘기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왜? 이건 신용불량자 대책의 ABC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3월19일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해명하고 나섰다. “일부 신용불량자들 사이의 모럴 해저드는 제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오는 부분이 있다 … 배드뱅크의 근본취지는 6개월 이상 채무 연체가 지속된 사람들이 채무를 완만하게 갚아나갈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일 뿐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점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추가적인 대책은 없을 것이라는 점도 못 박았다.

‘채무자 상대 고리대 장사’ 비판 타당

언론의 이런 배드뱅크 비판과 이에 대한 정부의 해명은 한 마디로 코미디다. 이미 개별금융기관의 신용회복지원회는 성실하게 갚는 신용불량자에게 원금의 30%를 감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6개월 이상 연체된 상각채권의 경우 원리금의 최대 50%를 감면해주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농가부채도 원금 탕감은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참주선동’을 해대는 것은 언론이라는 간판을 달고 할 짓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배드뱅크를 통해 3%의 선납금을 받고 또 15~20%대로 부실채권을 매입해 원금과 6%대의 이자를 받는 정부 대책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채무자의 신용회복을 돕기는커녕 고리대 장사”라고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기만 하다.

금융기관과 언론, 그리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가 구축하고 있는 이런 ‘채권자 독재’의 담론을 깨기 위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의 원내교섭 단체 구성은 지상과제다. 민주노동당 25개 핵심공약의 하나는 “공적자금을 조성해 신용불량자 중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 미성년자의 신용카드 채무를 탕감하겠다”는 것이다.

조준상 전국언론노조 교육국장(cjsang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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