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변함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노동계에 몸담고 있는 현장간부들과 열성조합원들의 고민 또한 심각했다. 앞으로 노사관계에 미칠 영향은 어떨지, 진보정당의 원내진출 가능성에 먹구름이 끼는 건 아닌지, 노동계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등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금속노조 대우종합기계지회는 오는 16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앞두고 탄핵국면과 연동해 여론의 향방을 검토하기 위해 휴무토요일인 13일 긴급회의를 갖기도 했다. 결국 찬반투표는 예정대로 진행하되, 쟁의행위 돌입시점은 추후 검토하기로 했다. 안재석 부지회장은 “나라 망하게 하는 꼴”이라며 탄핵국면을 답답해했다.

전국여성노조는 13일 학교비정규직 처우개선 즉각 시행 촉구 전국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학교급식지부 서영숙 서울지회장은 탄핵국면에 대해 “학교비정규직 처우개선안을 조속히 시행하라는 우리들의 요구가 묻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며 “평상시에도 국가가 우리를 생각해주지 않았는데 비상시국이라면서 또 얼마나 소외시킬까 싶어 걱정이 앞서지만 우선은 탄핵정국이 조속히 마무리되는 것이 순서일 테고 우리도 요구안이 해결될 수 있도록 보다 노력해야 겠다”고 말했다.

언론노조도 12일 예정된 ‘공익적 민영방송과 시민사회 역할’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집행부내에서 고민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강일섭 iTV지부 위원장은 “이런 상황을 만든 기존 정치권들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 이번 탄핵사건으로 보수정치권에 열린우리당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 확실해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노조는 일단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해서 탄핵무효 투쟁을 하고 조속히 총선국면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탄핵 당할 만하다. 그러나…

하지만 노동계에서도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나 마찬가지로 탄핵에 대한 입장은 엇갈렸다. 총선만 고려한 노 대통령의 행동이 탄핵을 자초했다며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으나, 탄핵을 할 자격이 없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국면을 만든데 대한 분노도 상당했다.


“처음 탄핵소식을 들었을 때 ‘노무현 샘통이다. 자기가 자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보건의료노조 최윤경 청구성심병원지부장).

“개인적으로 탄핵안이 가결되자 즐거운 기분이었다. 헌재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탄핵을 결정해 대통령을 파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국민건강보험공단 직장노조 권택근 홍보국장)

“개인적으로 탄핵이 잘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정책도 내놓은 것이 없고 서민들에 대한 민생고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니고…”(서울경인사회복지노조 권재수 서울시 장애인콜택시지부장)

“탄핵은 노무현 대통령이 오만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무시한데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강원용역노조 김성춘 위원장)


노동계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양비론이 판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탄핵안을 가결시킨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탄핵자체가 말도 안 된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어떻게 16대 국회가 탄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 민주, 자민련을 모조리 심판해야 한다. 한나라, 민주당은 미친 놈들이다. 총만 있다면 모조리 쏴죽이고 싶을 정도이다.”(하이트맥주노조 양인석 위원장)

“노무현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마저 흔들어대는 것을 보면서 정치판을 확 갈아엎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나 노동자들의 봉기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탄핵을 시킨 것이 너무 불만이고 노무현이 불쌍하다.”(공공연맹 산하 노조간부)

“마치 옛날로 회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수세력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노무현도 잘못한 게 많지만 국회의원들은 이후 상황까지 고려해서 행동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서울지하철노조 역무지부 오윤식 사무국장)

“개인적으로 노 대통령에 유감이 많지만 막상 탄핵가결 소식을 들으니 더 심하게 부패한 정치집단이 노 대통령을 탄핵시켰다는데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났다. 노무현의 잘잘못을 떠나 노동자들이 이유도 없이 해고되는 등 아픔을 겪고 있는데 이런 일들에 신경도 안 쓰고 정략적으로 대통령 탄핵에나 신경 쓰는 정치권이 다 밉다.”(로케트전기 해고자복직투쟁위 박진화 선전담당)

그래서 노동계는?

이들이 고민스러운 지점은 단지 이런 느낌을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남겨둘 수 없다는데 있다. 노동현안 문제나 4월 총선과 관련해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등 노조로서의 역할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취재에 응한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노무현 살리기 차원에서 열린우리당으로 결집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모지방본부장도 “정확한 대안이 뭐가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다.

앞으로 대응과 관련해선 크게 세 가지의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첫번째 주장이 보수정치권의 헤게모니 싸움에 끼어들 필요 없이 비정규직 차별철폐 투쟁 등 노동계의 본래 역할을 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탄핵정국에 돌입하자마자 국가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노사관계 안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점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싣기도 한다. 민주노총 일각에선 일부 지도부가 13일 울산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집중하지 않고 광화문에서 열린 ‘탄핵무효’ 집회에 참석한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14일 민주노총 홈페이지에는 ‘발전노조원’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민주노총이 (광화문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에 동참한 것은 경솔한 행동”이라며 “정치싸움에 끼어든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탄핵국면을 조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노동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노동계가 어떤 방식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입장이 갈라진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보수정치권 심판’을 목표로 내걸고 정치파업을 비롯해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자칫 이 구도가 ‘친노 대 반노’ 혹은 ‘탄핵찬반’ 구도로 가서는 안 되며, 특히 총선에서 내용과 정책으로 수구보수적 정치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적지 않은 국민이 공감하고 있는 ‘탄핵무효’를 주요 목표로 내걸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와 공동행보를 하면서 그 흐름을 주도, 결과적으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탄핵정국에 대한 성격과 대응전략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전술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노조 한 활동가는 “정치불안을 야기시킨 16대 국회와 대통령이 문제이기 때문에 탄핵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정치권 전체에 대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리베라호텔노조 박홍규 유성지부장은 “민주노총이 다른 시민사회 단체들과 똑같은 목소리만을 내는 것은 총선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민주노총은 우리의 색깔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노무현 정권 심판을 위한 탄핵이 노무현을 살리기 위한 총선내용으로 흐르는 것을 민주노동당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윤경 청구성심병원지부장은 “노동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럴수록 더 대중들을 만나서 민주노동당을 선전해야 할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총파업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고 말했다.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 윤병태 사무처장도 “이런 국면 속에서 어떻게 하면 정치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탄핵을 반대할 경우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어 노동계가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데, 민주노총 지도부와 노동, 민중 활동가들은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국면에 뛰어들어 어떤 점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이득이 될 것인지 알아내 챙겨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 홈페이지에도 14일 ‘자유인’이라는 네티즌이 “우리들이 뽑은 대통령을 썩어빠진 16대 국회쓰레기들이 국민의견도 물어보지 않은 채 탄핵했는데 왜 용트림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한국노총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민들 손을 잡고 울부짖는 한국노총을 보고 싶습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미묘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고 뚜렷한 대응방침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술렁이고 있는 노동현장의 힘이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정국에서 어떻게든 분출될 것이란 점은 자명해 보인다.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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