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조금은 더 ‘날을 세워’ 주길 바랐다. 보수정당의 여성 국회의원들이 ‘현실’론을 들먹이며 ‘여성전용선거구제’를 마치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최선의 안이라고 주장할 때, 좀 더 ‘앙칼지게’ 여성노동자의 몫을 요구하기를 말이다.

지난 10일, K-TV가 주최한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에 민주노동당 대표로 참석한 최순영(52) 부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했다. ‘삶의 여성정치’, ‘노동의 여성정치’. 어쩌면 핏대를 올리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주제다. 하지만, 최 부대표는 다른 토론자들의 말을 반박할 때조차 “다 맞는 말씀인데요”라고 시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백 마디 논리보다 그의 삶이 바로 여성정치의 필요성을 가장 확실히 웅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순영. 아직까지도 ‘민주노동당 부대표’라는 직함보다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 상징인 ‘YH노동조합’ 위원장이 더 익숙한 그를, 지난 21일 여의도 민주노동당사에서 만났다.

“동료를 팔아서 동생 공부시킬 순 없었다”

지난 70년, 강원도 강릉에서 남동생 세 명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8살 최순영. 아는 친구를 따라 종업원이 4,000명에 달하던 YH(사장 장용호의 이름을 딴 용호무역의 약자)에 입사했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 조그만 하청공장을 차리려 했던 ‘모범여공’이었다. “‘노조를 만들면 하루 8시간 노동에 일요일날 쉴 수 있다’고 동료들이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어차피 그만둘 건데 동료들에게 좋은 일 하고 그만두자고 마음먹었지요.”

물론, 주동자들은 해고됐고, 그도 지부장으로 선출된 지 1주일 만에 해고됐다. 그 때 회사는 “노조를 그만두면 하청공장 차려주겠다”며 회유했다. 너무 화가 났다. “노조 한다고 하니까 이런 혜택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날 좋아하던 회사 관리직 하나가 남은 몸 팔아서도 동생들 공부시키는데 그런 돈 받는 게 어떠냐고 합디다. 그래서 나는 ‘몸을 팔지언정 동료를 배신할 수 없다’고 대꾸해 주었지요.”

유신을 무너뜨린 여자들

최순영

● 53년 강릉 출생
● 75년 YH노동조합 위원장
● 84년 비영리 보람탁아소 원장
● 87년 한국여성노동자회 운영위원
● 89년 부천여성노동자회 회장
● 91,95년 제1,2대 부천시의원
● 부천가정법률상담소 소장(현)
● 경기여성연대 공동대표(현)

해고된 뒤 복직투쟁을 하던 최순영은 노동사무소를 찾아 “복직시키지 않으면 노동조합 간판 붙들고 분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몇 해 전 있었던 전태일 열사의 분신 때문인지 한 달 만에 복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됐다. 최순영은 동료들과 강원룡 목사가 주도하던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찾았다. “그 때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고, 노동자로서 평생 노동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싸움은 79년 회사 쪽에서 폐업공고를 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78년 결혼한 뒤 임신 6개월이었음에도 최순영은 민주노조를 보호하고 노동자의 억울한 노동과 삶을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싸웠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투쟁 장소는 당시 제1야당이던 신민당사. 대통령 박정희가 농성자들을 끌어내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전갈이 전달된 그날 밤, 시경국장 이순구가 직접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기동대가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습격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 김경숙이 죽었다. 그리고 불과 한 달도 못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고, 천년만년 갈 것 같던 박정희도 죽었다.

‘삶의 여성정치’

그 후 최순영은 비영리법인 보람탁아소 설립과 한국여성노동자회, 부천여성노동자회 활동을 통해 본격적인 ‘삶의 여성정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선다. 기성 부패정치를 준비된 여성, 훈련된 여성의 힘을 통해 바꾸자고 했고,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천지역을 중심으로 주부를 상대로 교육을 실시했다.

“제가 부천에서 1,2대 시의원을 했습니다. 무소속으로. 지역에서 주부운동을 통해 정치문화를 바꿔보자고 시작했기 때문에 정당의 구조와 정당의 행태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는 여성들이 뿌리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

최순영은 여성에다, 무소속이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주부 20명으로 의정활동을 모니터링하고 감시할 ‘의정지기단’을 만들어 회기가 열릴 때마다 참관하여 발언내용을 정리하고 문제점들을 짚어내도록 했다. 다른 의원들이 긴장하는 건 당연지사. “전 제가 뛰어나서 시의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치는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지역주민들과의 호흡이 중요하다고 봤고, 특히 정치에서 소외됐던 여성들을 정치의 주인으로 이끌어내는 데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정치성은 노동조합 활동이나 지역공동체 활동 등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서구 유럽의 경우 여성정치인도 많고, 훈련된 여성정치지망생도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노동조합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높다는 점입니다.”

낙천운동의 한계, 그리고 당과의 인연

“최순영이 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 총선 당시이다. 당원도 아니었던 시절, 그는 1주일 휴가를 내고 권영길 대표가 출마한 창원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부천에서 낙천운동을 계속 할 수도 있었는데, 낙천대상자를 떨어뜨린다고 해도 당선될 만한 사람 역시 싫더라구요. 나라도 출마해서 떨어뜨리고 싶었죠.”
그런 인연으로 최순영에게 당 여성위원장 제안이 왔고, 진보정당의 중책을 맡는 것이 과분한 것 같다며 계속 거절하다, 결국 2002년 부대표를 맡게 됐다.

“노동계나 여성계나 아직 정치에 대한 관심은 아직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울산이나 거제, 창원 등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노동자들만 단결되면 될 텐데… 머리띠만 두른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노동자나 농민이나, 이제 우리가 국회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내친 김에 그는 노동계에 할 말을 더 쏟아낸다. “엊그제 고 박일수 열사가 있는 울산을 찾았을 때도 비정규노동자가 차별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지경인데, 노동운동은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제 몸 바스라질 정도로 일해서 돈을 많이 번다한들 자본주의 체제 내에 있는 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 하는 의식전환훈련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대선 때도 권 대표와 함께 현장을 순회하면서 하청노동자들의 차별실태를 눈으로 보았을 때, 제가 하청노동자였다면 정규직노동자들 보기 싫어서 정규직노조가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을 찍지 않으려 했을 겁니다. 당과 노동운동 진영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운동을 하는 것이 곧, 웰빙(well-being)

만약 노동운동을 안 했더라면 지금 가발공장 하청업체 사장 쯤을 하고 있을 것”이라던 최순영은 갑자기 ‘웰빙’이라는 엉뚱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운동을 하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재미도 없고 보상심리도 생기는데, 나를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니까 즐겁고 기쁘다.” 가치를 세우고 가치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더 좋은 ‘웰빙’이 어디 있냐는 소리였다.
YH 때 엄마 뱃속에 있던 아가, 민재가 지금은 25살, 훤훤장부. 엄마와 아빠의 뒤를 이어 이웃을 도울 재목이다. 학원 한번 보낸 적 없지만, 아들한테 미안해하지 않는 엄마고, 엄마한테 섭섭해 하지 않는 아들이다. 그 점에서 아빠의 역할이 컸다.

“황주석씨(55)라구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1세대 노동운동가죠. 다른 노동조합은 대부분 종교단체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운동을 하는데, 유독 YH만은 지부장 혼자의 힘으로 꾸려가는 것이 신기해서 조합에 자주 들르더라구요. 조합원들이나 상집 간부들이 좋다고 시간만 나면 조합에 오더라구요. 지금은 YMCA에서 활동하다 건강이 안 좋아 잠시 쉬고 있어요.”

참, 27일 오후 6시 용산 철도예식홀에서 70년대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여성지도자의 삶을 담은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18살 공순이’ 최순영이 어떻게 여성노동자의 리더가 됐는지 궁금하다면,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하면 여성과 노동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이정희 기자(goforit@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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