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지난 14일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의 '기업인 수사 선처' 발언이 나왔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의 회견에서의 “대선자금 수사는 목적달성 수준에 그치고, 기업인 처벌로 진행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발언은 ‘경제 살리기’ 차원이란 뉘앙스를 줬다.

하지만 파장은 컸다. 참여연대는 “기업인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를 사전에 제한하고 검찰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검찰은 “기존 방침이 흔들리진 않을 것”이란 공식입장을 밝혔다.
장면 둘. 18일 전경련 정기총회,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제29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총회 뒤 송광수 검찰총장을 방문, 기업인 선처를 요청했다. 요지는 ‘신규사업 구상, 투자계획 등에 어려움이 많아 수사가 빨리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돈을 준 건 잘못이나 사회기여 등을 고려, 선처를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재계 대표가 석 달 만에 검찰청사를 두 번씩이나 찾아와 ‘읍소’한 셈. 송 총장은 수사 조기종결엔 화답했지만 ‘선처’부분엔 “국민정서,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겠다”고만해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 걸린 기업에 대한 사법처리가 임박한 모양이다. 그동안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재계 한쪽에선 잔뜩 불만을 터트려 왔다. 경기가 침체된 마당에 “기업인을 구속하는 게 최선이냐”는 것이다. 기업입장에서야 할 말이 없진 않을 것이다. 정치권의 ‘협박’에 못 이겨 불법자금을 건넨 면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대한상공회의소가 자산 2조원 이상 31개 재벌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3.3%의 기업이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우려해’ 돈을 줬다고 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행으로 제공했다’는 건 26.7%, ‘순수 후원’은 6.7%에 그쳤다. 기업인의 의식 한가운데 ‘정치인 = 가해자, 기업인 = 피해자’라는 등식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기업인들은 스스로 주장하듯 ‘피해자’일까. 비리가 없다면 큰 돈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사업상 특혜를 바라고 정치권의 요구에 응한 것은 아닐까. 과거의 예를 비춰 기업의 비자금이란 게 상당부분 이런 목적으로 조성된 게 아니던가.
“외국인 투자가 빠져 나간다”, “대외신인도가 떨어진다”, “투자계획을 취소해야 할 판이다” 등 불법 정치자금을 수사할 때마다 툭하면 ‘경제 위축론’이 득세하며 정치개혁의 발목을 잡았다.
기업에서 검은 돈을 거둔 정치인을 엄벌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피해자일 뿐이어서 면책 내지 선처 대상일까. 한 푼을 갖고 다투는 게 기업의 생리다. 대형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특혜나 반대급부 등을 노리고 정치권에 ‘대가성’ 불법 자금을 건넨 사실이 드러난 것만도 한둘 아니다.
노 대통령의 기업인 선처발언이 나오자 재계는 일제히 공감을 표시하며 기대를 나타냈다. 그런데 뒷맛이 개운치 않다. <중앙일보> 홍 회장과 삼성 이건희 회장과의 관계는 세상이 다 안다. 삼성이 한나라당에 건넨 추가 불법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늘면서 이 회장에 대한 조사 필요성도 제기된 상태다. 때문에 노 대통령이 <중앙일보>와 회견을 통해 삼성 쪽에 ‘선물’을 준 게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와도 대통령으로선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물론 기업인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검찰 수사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도 있다. 그렇지만 기업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선처’ 얘기가 나오는 건 순서가 바뀐 것이다. 기업인을 처벌하든 선처하든 이는 진상이 드러난 뒤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다.
검찰의 사법처리 기준 중 하나는 ‘얼마나 수사에 협조했느냐’다. 안대희 중수부장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기업인들을)마구 구속하진 않는다. 자수?자복(自服)하면 감경조치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응 처분은 당연하다.” 협조를 전제로 선처하는 수사기법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기법에 따른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기 힘들다는 판례가 있다. 죄가 있으면 처벌하는 게 원칙이다. 이는 정치개혁뿐 아니라 경제회생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진상규명은 철저하고 공평히 이뤄져야 한다. 국민들은 불법자금의 외형, 한나라당과 노무현 캠프의 몫에 더해 연루기업인 단죄 범위와 수위에 주목한다.

박길명 편집차장 myung@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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