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힘입은 5% 성장 낙관…고용창출 조건은 어두워


지난 12월23일 박승 한국은행 총재와 경제연구소장, 대학교수 등은 한은에서 경제동향 간담회를 열고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당면과제를 제시했다. 핵심은 2004년의 경제성장률이 5%대에 이를 전망임에도 일자리는 늘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어려웠던 2003년 경제를 뒤로하고 새해의 전망은 장밋빛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을 두 달 전의 전망치 4.8%를 수정하면서까지 5.3%로 높여 발표했다. 한국은행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잃어 잠재성장률이 4.8%로 낮아졌다고 하면서도 올해 성장률을 5.2%로 높게 예측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5% 안팎. 따라서 5% 이상의 성장률 전망치는 2배나 높은 것으로 중국과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이다.
장밋빛 전망의 근거는 지난해 국내 경제를 어렵게 만든 내수경기가 살아날 것으로 보기 때문. 여기에다 세계 경기가 활황세를 보여 수출경기 호조세가 지속될 것이고, 이는 국내 설비가동률을 높여 고용회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이른바 ‘일자리 없는 성장’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용 정체’ 또는 ‘고용 감소’ 현상이 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3만7천 개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용흡수력이 높은 내수 부문이 침체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실업률이 실제 느끼는 것보다 낮게 나타나는 것은 구직을 아예 포기하는 실망실업자가 늘고 있는데 따른 통계적 착시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통계청의 고용동향에 따르면 취업자 수는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지난해 4월 마이너스 0.7%를 기록한 이래 10월까지 지속적으로 줄었다. 지난해 11월 취업자는 마이너스 0.1%로 전달에 비해 또다시 감소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서는 300명 이상 대기업의 일자리가 1997년 180만9천명에서 2002년 162만4천명으로 줄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최근 본지 창간 1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대기업을 비롯한 소수의 상위 괜찮은 일자리만 남고 나머지 일자리는 털어버리는 식의 중,하위 일자리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보수와 고용안정성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다.

수출호조에도 내수파급 적어

사실 ‘일자리 없는 경기회복’(jobless recovery)은 세계경제의 주요 이슈다. 미국의 경우 지난 3/4분기에 8.2%의 유례없는 고성장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 사이 1년 동안 일자리는 오히려 59만5천개가 줄었다.
문제는 선진국에선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대에서 나타난 고용 감소 현상이 한국에서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대에서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과일이 채 익기도 전에 나무에서 떨어져버리는’ 식이다.
정부도 ‘일자리 없는 성장’이 고착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이와 관련해 “올해 단기적으로 소비를 진작시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라며 “고용을 늘려 소득 능력을 키우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당장 기업들이 고용창출 조건인 설비투자 확충에 나서기 어렵다면 정부가 우선 적자재정을 편성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럼 이런 현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경제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우선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다.
정보화와 첨단 설비 도입 등으로 고용을 늘리지 않고도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기업들이 노사불안과 고임금 이유로 고용 확대를 꺼리고 있다는 것. 서강대 남성일 교수(경제학)는 “기업인들은 이런 요인 때문에 국내 투자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일자리를 줄이는, 즉 생산성 향상 투자에 국한하고 있다”며 “일자리를 늘리는 투자를 하려는 기업은 중국 등 해외로 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으레 수출이 증가하면 기업들이 생산설비 확충을 위해 투자를 늘리고 이에 따라 고용이 확대되면서 소득이 늘어난다. 이는 다시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수출,소비,투자 중에서 수출만이 ‘나홀로’ 성장을 이끌고 있다.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이 국내 생산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일례로 정보기술(IT) 위주의 수출품목 교역을 따져보면, 대부분 생산설비와 중간재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수출이 호조를 보여도 내수 부문으로 파급되는 효과가 크지 않다.
우리 경제의 수출 의존도가 커지고 있지만 국내의 다른 원자재 및 중간재 생산 기업은 수출 증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수출의 고용유발 효과도 내수 부문에 비해 작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수출,소비,투자가 각각 10억원 늘어났을 때 여기서 고용을 유발하는 효과는 1998년 현재 수출 12.3명, 소비 17.9명, 투자 18.3명으로 나타났다.

정치불안이 경기위축 우려

한편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불안이 가중되면서 막 나타나기 시작한 경기회복세를 다시 위축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치불안 변수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성장률이 4%대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전망 2004’에 따르면 정치자금 공방을 비롯한 정국의 대치국면이 장기화하고 정치권의 힘이 선거에 집중돼 총선 전까지 경제회복 및 민생안정과 관련된 정책 노력이 불충분할 전망이다.

연구소는 특히 총선 이후에도 국가 비전과 현안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지 못하면 성장 동력의 확충과 투자확대 등을 위한 정책과제를 추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구소는 이와 관련해 신군부 집권으로 정국이 요동쳤던 1980년의 경험을 제시하며 당시 정치혼란에 따른 경제주체들의 불안으로 소비와 투자가 각각 0.3%, 10.7%로 급감하고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1%로 곤두박질쳤다고 지적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총선이 치러진 해와 이듬해에는 정국불안의 후유증으로 경제성장률이 정체하거나 큰 폭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소는 분석했다.
한국은행도 “올해 성장 전망치를 5.2%로 내놓은 것은 정치. 사회적 변수가 비관적 상황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한 것"이라면서 ”정치상황이 계속 악화될 경우 5% 성장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은 일자리 없는 경제성장 시대를 맞아 정부가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재계와 노동계를 향한 목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투자,고용 확대 기피증과 노사갈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원덕 원장은 한은 경제동향 간담회에서 “외국에서 성공을 거둔 노사평화 대타협 선언이 필요하다”며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는 각각 1982년과 87년 노사 대타협을 통해 갈등에서 벗어나 성장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일자리 없는 경제성장은 빈부격차 확대와 분배 악화를 초래할 뿐이다. 성장의 열매가 모든 계층에 고루 돌아가게 하자면 고용 확대가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박길명 기자myung@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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