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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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금융노조, 사무금융연맹 공동기자회견 사진
발문 - 일은 정부와 기업이 벌여놓고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노동자들에게 또 목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너무도 책임이 분명한 사태를 두고, 일자리를 만들자고 하면서 일자리를 없애는 모순 앞에서 일자리 창출이 최대의 분배라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다.


초겨울의 잿빛 날씨가 올해라고 다를 리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난히 춥고 을씨년스럽다고 말한다. 그 만큼 삶이 힘들어진 때문인 듯싶다.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희망이라도 찾으려 숨 가쁘게 움직여보지만 고달픔만 더하다고 한다. 그나마도 가슴조리는 충격이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 지난 11월 후반 열흘 사이 근로서민들과 금융계 노동자들은 국내최대 카드회사의 사고 때문에 진땀을 흘리며 허둥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로서민들이 카드회사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신용카드는 이제 웬만한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생활수단이 되어 있다. 카드 회원수가 5천만명을 넘어서 있고 카드돌려막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1백만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카드돌려막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득이 없는 실업자이거나 소득이 낮은 비정규직노동자이며 자금융통이 여의치 않은 영세 소상인들이다. 이들이 돌려막기를 못하게 되면 곧바로 신용불량자로 몰려 모든 사회경제활동이 중단 당하게 될 것이니 이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카드회사의 위기가 미치는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카드를 받는 가게, 돈 빌려 준 금융기관, 일반사채업자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고 나아가서는 금융기관을 뒤흔들어 경제위기로까지 발전될 수도 있다. 경제위기가 오면 온 나라가 치욕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고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삶은, 강요되는 구조조정과 소득감소 앞에서 또 다시 처참하게 유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5, 6년 전 IMF위기가 던져준 현대 자본주의의 냉엄한 가르침이다.

정책오류와 재벌기업의 탐욕이 빚어낸 카드대란

엘지카드 사태는 적자 누적으로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 현금흐름이 끊기면서 일어났다. 엘지카드는 곧바로 채권단 지원을 받지 못하면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고객에 대한 현금서비스를 중단하였다. 다른 카드사들은 엘지카드와 중복해서 가입한 회원의 현금서비스 한도를 줄였고 일부 상점에서는 엘지카드 취급을 거부하였다. 충격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정부는 8개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을 모아 엘지그룹에 2조원을 융자해주게 하였다. 이렇게 일단 엘지카드는 현금유통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전체 카드업계도 유동성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게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지난 3년 사이 급부상했던 카드업계가 이처럼 위기에 몰린 뿌리는 외환위기 후 정부가 추진한 소비촉진정책이었다. 정부는 내수를 살린다고 카드 이용을 부추기다 못해 강제하였고 현금서비스를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다.

대부분 재벌기업이거나 대형은행 계열인 카드사들은 정부 지원을 업고 나이나 소득을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행하였고 경쟁적으로 현금서비스를 늘렸다. 카드장려정책은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옛말처럼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촉진하였다. 저축이 미덕이라는 얘기는 사라지고 신용을 기반으로 한 미국식 고도소비사회가 자리를 잡는 듯 하였다.

카드의 남발은 일시적으로 수요를 촉진시켜 경제성장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경고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구조조정의 여파로 취업도 소득도 불안정한 계층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카드부채를 갚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말이 좋아 현금서비스지 사실은 고리대이었던 것이 이를 부채질하였다. 은행의 가계대출금리가 10%미만인데 비해 카드의 현금서비스 금리는 15%에다 연체금리는 20%를 넘어선다. 소비자들은 카드를 여러 장 갖고 돌려막기라는 방법으로 대처하였지만 부채와 연체율은 높아지기만 하였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유흥업소로 빠지고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올 봄 카드업계에 5조6천억원을 지원하였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가장 방만하게 회원을 끌어 모은 엘지카드에 적자가 쌓이고 결국은 유동성 위기가 폭발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카드위기는 고용증대나 안정적 소득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은 유효수요를 소비자의 빚으로라도 늘리려 한 정부정책과 돈이 된다 싶으면 마구 달려드는 재벌기업들의 탐욕스러운 문어발 기질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구조조정 만능론의 날카로운 위협

우리는 이번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책실패의 실체를 다시 한번 경험하였다. 아울러 “나 죽으면 나라경제도 죽는다”며 시장원리를 압도하는 재벌의 위력을 재삼 실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융권의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관치금융의 관행을 재연하는 정부의 대담함도 분명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는 아니라고 위기발생의 관련자들은 말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잘 갈무리만 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풀려가는 것 같지 않다. 카드위기가 깨끗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8개 카드사의 적자는 엄청나게 누적되어 있고 회원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에 경기회복은 매우 유동적이다. 카드사들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이미 현금서비스 한도를 줄이기 시작하였고 연체증가와 신용불량자가 400만명 - 카드관련은 228만3천명 - 에 육박하리라는 전망이다.
카드사, 은행, 정부는 경기가 풀리고 신용불량자들이 제대로 돈을 갚으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공언하고 있다. 카드사마다 인력과 조직을 줄이고 유동성 문제에 대비하여 대출자산을 크게 감축하는 한편 은행과의 합병 등을 서두르고 있다 한다.

엘지는 전국의 지점 50%와 인력 25% 감축을 뼈대로 한 구조조정안을 내놨고 외환카드는 외환은행에, 우리카드는 우리은행으로 합병된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엘지카드 사원들은 우리사주의 값이 폭락해서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게 생겼다. 한미은행, 제일은행 등 외국계 대주주들도 경영권 매각을 추진하고 있고 현투증권은 이미 매각이 마무리단계이며 국민은행도 인력감축을 계획하고 있다 한다. 금융계 대규모 구조조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증권 보험업계도 너나없이 구조조정을 계획하거나 추진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외국자본들은 알토란같은 금융기업들을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제조업과 달리 국내 금융회사를 인수할 경우 수익을 고스란히 빼내갈 수 있는 매력적인 사냥감을 놓칠 리 없을 것이다. 금융위기의 극복은 국민경제의 근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금융노동자들은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정부와 카드사 및 채권은행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리고 경제시스템의 위기에 대해 정부가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와 기업 쪽은 구조조정이라는 손쉬운 해답을 고집하고 있는 듯 하다. 일은 정부와 기업이 벌여놓고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또 목을 내놓는 방법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책임이 분명한 사태를 두고, 일자리를 만들자고 하면서 일자리를 없애는 모순 앞에서 일자리 창출이 최대의 분배라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이다. 또한 일방적 구조조정이 여전히 횡행하는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연대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의 요체라는 논리가 설 땅도 그다지 넓어보이지는 않는다.

분배와 사회통합의 정의는 약한 쪽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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