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구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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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로드맵

산을 오르면 개척된 등산로를 따라 이정표가 있다. 그러나 가끔 위험한 상황이 되면 통제 또는 폐쇄된다. 이른바 노무현 정부의 노사관계 개혁 이정표인 로드맵(road-map)은 비정규 노동자들로부터 폐기를 요청받고 있다. 그 길은 천길 낭떠러지 벼랑인 죽음의 계곡이기 때문이다. 일개미나 일벌의 신화는 고도의 분업체계와 높은 생산성이 빚어낸 신기루다. 일만 하다가 폐기처분되는 존재인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비정규 인생이다.

이들 비정규직들로 구성된 노조들은 지난 20일부터 여의도에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인 수백억을 꿀꺽 삼킨 국회의원들의 눈에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비정규 노동자들이 늦가을의 찬바람을 안고 있다. 오는 26일 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는 지난 한 해의 투쟁을 결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결의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작년 가을 시작한 비정규직 철폐 100만 서명운동에 불구하고, 비정규 문제는 아직 정규직 중심의 조직 노동자들에겐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의 ‘수세기’라고들 한다. 고용안정이 주요한 투쟁과제가 되는 한 노동운동의 전략, 전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신산업예비군

일반적으로 실업률을 중심으로 완전고용(full-employment)과 불완전고용을 얘기한다. 완전고용이 노동자의 취업률이 100%에 근접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실업률이 몇 %가 돼야 완전고용이라 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이 불분명하다. 한국처럼 5% 이내를 완전고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6%나 유럽의 7%(유럽식 모델이 실업률이 높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를 완전고용으로 볼 것인가. 이제 고용문제의 핵심은 ‘안정고용(safety or stability employment)’이냐, ‘불안정고용’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용(employment)이냐 실업(unemployment)이냐의 문제, 즉 전통적 의미의 산업예비군에서 ‘신산업예비군’이라 할 비정규 인생의 불안전고용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안정고용은 그것이 ‘안정고용’으로 포장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불안정 소득이 일반화됨으로써 열심히 일할수록 빈곤해지는 ‘자본주의 노동의 역설’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과 지니계수가 보여주는 불평등의 심화는 불로소득집단의 구조적 착취로 인한 고용불안의 현대적 표현인 불안정 고용과 불안정 소득이다.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외치는 노무현 정권과 지난해 이맘때쯤 ‘노조공화국’ 시리즈를 내밀 때, 그리고 올 노동자들의 투쟁시기에 ‘노동귀족’으로 몰아치면서 2010년 국민소득 3만불의 지식강국을 노래하던 자본의 언론은 끊임없이 성장이후의 분배, 즉 일자리 창출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도의 노동생산성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growth without employment) 또는 직업창출 없는 성장(jobless growth)으로 불려지는 20 대 80의 사회를 향해 나가고 있다. 개미집단은 20%만 일해도 될 정도로 사회적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미는 지구상에서 1억만년 동안 존재해 오면서 300만년에 불과한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인가?

주변부 인생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축적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다수의 노동자들을 통제하면서 빈곤을 부과하고 낮은 임금의 불안정 고용 속에 빠뜨리고 있다. 막스베버는 서구자본주의 근대화의 본질은 합리화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의 합리화는 이윤축적과 노동에 대한 분할, 착취로 나타났다. 더욱이 1,2차 세계대전의 제국주의 침략과 오늘날 미국의 세계패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진행되는 이라크 침략은 전쟁의 근대화이고, 이는 총자본의 총노동에 대한 공격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일개미와 병정개미처럼 노동에서 착취당하고 전쟁에 동원(이라크 파병)되고 자본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다. 자본에 의해 철저하게 마름으로 위치하는 핵심직원과 다수의 주변부 노동자로 구분된다. 비정규노동자들의 단결 역시 전문가와 프리랜서 등 다양한 차별구조로 약화시키고 비정규 인생들에게 ‘일개미의 신화 창조’에 몰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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