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정보통신노련 정책기획국장)

한비자 이야기 하나.
간법금이무모여(簡法禁而務謀慮) 황봉내이시교원자(荒封內而?交援者) 가망야(可亡也). [망징편(亡徵篇)]
법령(法令)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 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자’가 전하는 이야기이다.

노무현정부 들어 비정규직 문제가 부쩍 부각되고 있다.
노동부는 기획예산처까지 끌어들여 공공부분 비정규직 실태를 파악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새 정부 들어 노동부가 예전과 달리 노동현안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근원적 처방인 고용시스템과 관련법령을 정비하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를 관조한다면 결국 한비자의 진언처럼 나라의 흥망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단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계급 내의 분열을 타고 넘어 사회갈등의 양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결국 자본이 바라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한비자 이야기 둘.
상상(?像)은 실물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중국 사람들이 코끼리뼈로 코끼리 형상을 짐작해 나온 상상(?象)에서 유래했다. 이 또한‘한비자’가 전하는 이야기다. 상상이란 현실에 있는 이미지 조각을 모으고 조합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중국인들이 뼛조각으로 코끼리를 꾸며낸 것처럼 말이다. 망상이나 몽상과 달리 상상이 힘을 갖는다면 이는 뼛조각 때문이다. 현실에 발 디딘 상상은 다시 현실을 부수고 재조립한다. 노동자계급의 통 큰 단결은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이며 목적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계급적 연대는 이 땅의 노동운동의 위기를 부수고 재조립하는 아름다운 상상이다.

또한 중국인들의 상상의 동물인 용의 목덜미에는 거꾸로 돋은 비늘이 하나 있다. 이른바 '역린'이다. 재주가 좋아 용을 탄 사람도 절대 이 비늘만은 건드리면 안된다. 역린을 건드린 사람은 용의 분노를 사 반드시 죽는다. 이 또한 한비자에 나오는 고사다. 그래서 왕조 시대에는 군왕에 대한 금기사항을 '역린'에 비유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규모는 정부발표와 노동단체의 발표가 서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서 실제로 국민들은 우리 사회 비정규직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비정규직 문제가 노무현정부 들어 부각되고 소외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정책이 추진될 거라는 정부발표에 어림잡은 비정규직 규모의 슬픔에 대한 설익은 동정으로 어설프게 기댈 뿐이다.
노동운동하는 우리에게도 비정규직 화두는 가슴에 채 담아내지 못할 뜨거운 불륜이다.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에 대한 계급적 단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마치 역린의 경우처럼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나서면 밥그릇에 혈안이 된 정규직의 분노를 사는 꼴이 아닐까?

정규직 노동자 안의 부끄러운 파시즘은 없는 걸까?
절망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우리시대의 상상은 공허한 누각을 짓는 일이 아니라 천민자본의 그늘에 신음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의 고난을 천상(?常)의 도리로 바꾸는 일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계급적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의 위기를 정면으로 극복하는 일.
지금 양대노총이 시급하게 배치해야될 선결과제이며 나아가 신자유주의 광란 속에 노동이 아름다운 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자본의 약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경쟁시키면서 정규직에 의해 비정규직을 거세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파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선은 너무도 느슨하다. 인간의 체온없는 신자유주의 칼날 앞에 내부의 한줌 기득권에 매몰되고 있지 않은가 반문해볼 일이다.
노동자의 희생 위에 기생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약탈에 우리 노동자가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노동공동체의식만이 유일하다. 그래서 오늘도 난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을 그리며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라는 자본의 용어가 천만노동자로 단일하게 불리우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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