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도착한 지난달 12일, 일요일인데도 밤 8시부터 총리 관저에 총리와 재경부 장관, 노사 단체 대표들이 모여 다음날 새벽까지 노사정 합의를 위한 밤샘협상을 벌였다. 13일 멕시코 방문을 위해 떠나야 하는 버티 아헌 총리가 출발 직전까지 새로운 제안을 하고 협상에 나선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노사정 합의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로 불리며 8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22년 독립 뒤에도 별다른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유럽의 후진국이었다. 87년에는 실업률 17%,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의 120%에 이르는 경제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유럽연합 가입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노사정 합의로 경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아일랜드는 15년 만에 실업률 4.3%,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부자 나라로 기적처럼 변신했다. 최근 10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8~10%의 급속성장을 했다.

아일랜드기업고용주협회(IBEC)의 브렌든 버틀러 산업국장은 “중앙과 산별교섭의 전통이 있었으나 70년대 말 지역, 기업별 교섭으로 분산되면서 협상이 잘 안되고 갈등도 심했다. 1983~1984년 무렵에는 곳곳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고 높은 임금 인상, 심각한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정부부채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1987년 위기감 속에서 사회협약을 먼저 제안한 것은 아일랜드노동조합총연맹(ICTU)이었다. 아일랜드노총 올리버 도노휴 홍보국장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이 심했다. 일자리와 집을 잃고 세금은 높아지고 많은 노동자들과 가족이 이민을 떠나야 했다. 임금 인상을 많이 해도 물가가 더 올라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노조가 먼저 협상을 제안했다. 노조는 해결책의 일부가 되든지 문제의 일부가 되든지 선택해야 했다”고 말했다.

노조의 제안에 따라 정부, 노조, 경영자는 위기를 극복하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협력하기로 하고 87년 국가경제사회위원회(NESC)에서 첫 사회협약을 맺었다. 3년마다 한번씩 지금까지 5번 맺어진 협약의 큰 틀은 노조가 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 이하로 완만하게 되도록 양보하는 대신 정부는 세금을 낮추어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을 높이고, 경영자는 생산력을 높여 고용을 늘린다는 내용이다. 노조가 계속 임금 인상을 양보한 데 대해 노동계 내부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노휴 국장은 “노조 안에서 불만이 있었지만 합의 때마다 내부 투표를 하면 반대 의견은 25% 정도였다. 활동가들은 반대라고 떠들지만 실제 투표에서 다수의 조합원들은 찬성했다. 노동자들은 노사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게 낫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다. 합의 뒤 10년 동안 160만개의 새 일자리가 생겼고, 1인당 국민소득은 유럽연합 평균의 80%에서 105%로 높아졌다. 정부가 법인세를 유럽평균의 3분의 1 수준인 10%로 낮추는 등 파격적인 외자유치 정책을 실시한 결과 파이저 등 세계적 제약회사와 마이크로소프트, IBM, 델, 인텔 등 1200여개 외국기업이 몰려들었다. 유럽에서 팔리는 개인용 컴퓨터의 3분의 1은 아일랜드 제품이다.

노사의 사회적 파트너십을 거치면서 노사관계도 안정됐다. 고용주협회의 버틀러 국장은 “파트너십을 통해 경영계와 노동계는 함께 대화하고 행동할 때 훨씬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을 보았고 노사관계도 좋아졌다. 노사 모두가 이겼다”고 말했다. 노총의 도노휴 국장도 “자본가들과 노조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사회합의를 통해 차이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원래 노조 자체를 무시하려는 극소수의 기업들과는 여전히 대화가 불가능지만, 문제는 있어도 대화를 열어 놓았던 기업들의 노사관계에서는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 아일랜드의 노사정 사회협약은 처음으로 큰 위기에 부딪혔다. 지난해 새로운 협약을 맺어야 했지만 크리스마스 전에 논의가 결렬됐고 올해 초 다시 시작된 논의는 아직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에 세금 감면을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밝히자, 임금 인상 부담이 커진 재계가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10년 이상 계속된 급성장 속에서 기업의 이익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진 것도 원인이다.

노조 인정 문제도 쟁점이다.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영국처럼 법보다는 노사의 자율적인 협상으로 노사문제를 해결해 왔고, 노조를 인정해야 하는 법적 의무 없이도 신사협정이 유지돼 왔다. 아일랜드의 노조조직률은 46%로 높은 편이며, 사기업은 30%, 공공부분은 70~80%의 노동자가 조직원이다. 도노휴 국장은 “지금까지는 회사가 노조를 중요한 파트너로 대해 왔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노조와 협상하지 않고 노조 가입자에 불이익을 준다. 그래서 이번 합의에서 노조인정법안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난제들에도, 아일랜드 노사는 총리가 지난달 12일 밤 제안한 7개항의 중재안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총리의 제안은 노조가 요구한 7%의 임금 인상을 18개월 동안 ‘점진적’으로 하고, 노조인정법안, 공공주택 공급 확대, 해고 요건 강화 등은 수용한다는 것이다. 도노휴 국장은 “꼭 합의가 될 것”이라며 “정부의 중재안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어려운 과거를 잃어버리고 노사 모두 더 많이 얻으려는 낭만적 환상을 가질 수 있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지금까지 힘든 국제 경쟁 속에서 노사정 파트너십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노사 모두 협상의 틀을 깨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블린/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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