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협상 체결 일주일 뒤부터 단체협상을 시작하기로 노사가 동의했잖아요. 교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단체협상에 대해 논의해봐야 되지 않겠어요?"(문현정 위원장)

"일차적으로 비정규직 스탭들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고 봅니다."(이정환 회계감사)

지난 27일 서울 혜화동의 한 맥주집. 왁자지껄 대화 소리와 맥주잔 찧는 소리가 여기 저기 울리는 속에서 청년필름노조 조합원 5명도 주거니 받거니 얘기타래를 함께 풀고 있었다. 이날 모임은 지난해 12월 노조가 결성된 뒤 처음 가지는 노조 회식. 지난달 22일 임금협상이 체결된 것을 자축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자연스레 단체교섭 얘기도 나왔다.


첫 임협체결을 자축하고 있는 청년필름노조 조합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문현정 위원장.


* 국내 유일 영화사 임협 체결

민주노총 서울본부 소속인 청년필름노조는 기획·홍보, 제작 등 정규직 조합원이 고작 6명인 '초미니' 노조이지만 국내 유일의 영화사노조이기도 하다. 청년필름은 이른바 '대박'을 친 영화는 없지만 <와니와 준하>, 오는 4월 개봉예정인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 <질투는 나의 힘>을 제작한 영화사.

기자를 위해 조합원들이 '술기운'에 털어놓는 노조 결성 비사(?)도 흥미롭다. 회사 대표가 조직의 '배후'였다는 것이다. 학생운동 출신인 회사 대표가 "우리 회사에도 노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먼저 제안을 한 것. 때문에 아직까지는 노사가 험악하게 대립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임금협상 과정에서도 특별히 갈등이 생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현정 위원장은 "이른바 어용노조라는 소리 안 들으려고 임금협상은 노조 의지대로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원체 급여수준이 낮지만 이번 임금협상으로 총액 20% 이상은 올랐다"고 은근히 목소리를 굵게 했다.

이번 임금협상 결과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열흘씩의 연차가 생겼고 입사 1차년된 사원을 1호봉으로 규정해 근무 연차가 올라갈 때마다 호봉수도 오르게끔 했다. 그전에는 없었던 호봉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저임금의 빠듯한 '막내 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앞으로 들어올 후배를 위해 신입사원의 급여수준에 상당히 신경을 쓴 눈치다.

"처음 교섭을 시작할 때는 직급간 간격을 좁히더라도 신입사원의 기본급 인상은 목표대로 따내자고 결의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신입사원에 한해 기본급도, 상여금도 인상하기 힘들다면서 강경하게 나왔지요. 결국 기본급은 노조 목표만큼 인상하지 못하고 상여금을 많이 올렸습니다." 문 위원장의 부연 설명이다.

영화사 유일의 임협체결인 만큼 청년필름사의 노조결성과 그 사례가 다른 대형 영화사에도 영향을 미치기를 조합원들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곧 시작될 단체교섭. 영화제작인력의 90%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스탭들의 처우 문제를 단협에 못박겠다는 포부다.

* 비정규직 최저생계보장이 다음 목표

빈 맥주잔을 채우던 최순철 조합원은 비정규직 스탭의 근무실태를 화제로 꺼내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영화제작에 들어갈 때마다 계약을 하는 비정규직 스탭들은 경력이 짧은 사람을 기준으로 작품 한 편당 300만원에서 5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작품 한편의 제작기간이 아무리 짧아도 6개월 정도 걸린다고 쳤을 때 이들이 일년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1,000만원을 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 위원장은 "한꺼번에 이들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하기보다는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한다. 문 위원장이 말하는 기준은 청년필름 영화를 제작하는 스탭들이 최소 생계비를 일컫는 것이다. 이와 함께 '오야지'(경력자 스탭)가 받은 보수를 나눠주는 식에서 탈피해 최소한 제작기간에 해당되는 만큼은 개별적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끔 하는 것도 목표다.

"현장을 배운다는 생각에 저임금 노동을 당연히 여기는 영화판의 도제식 구조에선 스탭들이 직접 처우개선을 요구하다가는 곧바로 쫓겨날 가능성이 크지요. 일단 먹고사는 것만큼은 보장받게 하고 싶어요." 말을 끝맺은 조정화 조합원이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노조가 기대하는 것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청년필름의 비정규직 처우개선이 다른 제작 현장까지 파급되는 것이다.

'프로듀서 2001'이라는 제작자 인터넷 동호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정환 조합원(회계감사)은 기자에게 잔을 권하며 "우리 노조가 생긴 뒤 카메라, 조명 등 업종별 협회에서 상당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전한다. 비록 노조는 아니지만 '프로듀서 2001'을 비롯해 조감독협회, 촬영조수협회 등 영화제작 업종별 모임들은 현재 업종별 노조결성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청년필름의 사례가 업종별모임 입장에서는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정환 조합원은 "우리 노조가 먼저 기준을 마련해 향후 만들어질 업종별 노조가 기준으로 삼을 수 있고, 아니면 현재의 업종별모임과 우리 노조가 함께 스탭들의 처우개선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정규직인 청년필름노조 조합원들에게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 자신들의 처우를 낮아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는 것일까?

이정환 조합원은 "영화판만큼 정규직들과 비정규 스탭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고 각자의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 없다"며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불콰해진 문 위원장은 "우리는 정규직에다가 이번 임협체결로 최저생계는 보장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됐다"며 "이제는 또 다른 우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조합원들이 "건배"를 외쳤다.

김학태 기자(tae@labornews.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