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족벌·세습 경영
재벌개혁은 노무현 차기정부의 성패를 가름할 수 있는 핵심과제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정식 출범도 하기 전에 재벌들의 반발과 보수언론들의 ‘트집잡기’, 소관 부처들의 소극적 자세로 시련을 겪고 있다.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벌어지는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다섯 차례에 걸쳐 살펴봄으로써, 재벌개혁 필요성을 다시 한번 짚어본다. 편집자


최근 일부 재벌그룹 임원인사에서 총수의 아들, 사위들이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을 두고 세습·족벌경영이라는 비판이 높다. 또 대다수 소액주주들을 무시하고 총수가 제멋대로 하는 황제경영은 경영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물론,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족벌·세습경영 실태 = 지난해 말 현대백화점 정몽근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31) 부사장이 입사 4년만에 그룹총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올 들어서는 지난 3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씨, 조카 정일선씨, 사위인 정태영 신성재씨가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동반승진하면서, 각계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룹 총수의 자손들이 경영 능력과 관계없이 단기간에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한국재벌의 오래된 관행이다. ‘경영세습’이 진행 중인 국내 13개 주요그룹의 재벌총수 2~4세 출신 28명의 경영 이력은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표 참조) 이들의 최초 임원선임 나이는 평균 30.6살에 불과하다. 국내 주요 기업에서 새로 임명되는 임원의 평균 나이인 40대 중반보다 15년여나 빠르다. 20대에 임원이 된 이들도 현대차의 정일선(당시 29살) 정태영(26살) 부사장을 포함해 이건희 삼성회장(26살), 김승연 한화회장(25살), 정몽헌 현대회장(29살), 박삼구 금호회장(22살), 이웅렬 코오롱회장(29살) 등 7명(25%)이다. 60년대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또 이들이 입사 뒤 임원이 되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3.6년에 불과하다.

지난 2001년 이재용씨가 삼성전자 상무보로 임명될 때 시민단체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친 일이 있지만, 최창원 에스케이글로벌 부사장, 정일선 부사장, 정태영 부사장, 박삼구 회장, 김승연 회장, 조석래 효성회장, 이웅렬 회장 등도 회사에 기여한 것 없이 처음부터 임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임원까지 평균 3.6년 "능력 묻지마"
"회사조직·업무 혼란…인사정책 파괴" 비판

■ 폐해 = 재벌의 족벌·세습경영은 오래 전부터 도마 위에 오른 문제다. 재벌 임직원들은 “로열패밀리(총수가족)에 대해 흔히 경영수업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상 경영권 승계를 위한 요식행위”라고 말한다. ‘경영능력이라는 유전자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관행은 경영 안정성을 크게 해치고 최악의 경우 기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외환위기 전후로 망한 재벌그룹 가운데 쌍용·진로·동아·한일 등 상당수가 2세들이 경영하던 곳”이라고 지적한다.

족벌·세습경영은 회사의 조직과 업무에도 큰 혼란을 초래한다. 현대차 노조는 “총수의 아들이라고 매년 한 단계씩 승진을 하는 것은 다른 임직원들을 차별하고, 회사 인사정책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외국의 경우 대주주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최고경영자 자리로 직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미국의 피터 드러커는 “선진국의 ‘가족기업’들은 경영진 구성에서 ‘무능한 가족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며 “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적 화학회사 듀폰은 좋은 예이다. 듀폰 가문의 모든 남자들은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일할 자격이 주어지지만, 5~6년 이후 평가에서 사장감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경영수업 대신 다른 일이 맡겨진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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