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사장 구속 뒤 노조가 직접경영…노조·단체 상대로 재고품 특판 '숨통'

향후 진로는 아직 "모색 중"…4,300억 부채 해결이 관건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금천구 독산동의 (주)마이크로 코리아 공장 건물 3층에 있는 노조 사무실. 이 회사 직원 10여명이 차례로 서서 이렇게 한마디씩하며 전외숙 노조위원장으로부터 뭔가를 건네 받고 있었다. 월급 봉투였다.

예전 같으면 회사 경리과에서 직원 개개인의 은행 계좌로 입금했을 급여를 노조 위원장이 직접 나눠준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사장이 지난 2월 구속된 뒤부터 노조가 직접 회사 경영에 뛰어든 것이다. 멈춰있던 공장의 일부를 다시 돌려 얻은 수익에다가 정부로부터 보조받은 휴업수당을 합쳐 지난 5월부터 월급을 다시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달까지 모두 4번째인 셈이다.

"3년만에 제대로 된 월급 봉투를 손에 쥐는 순간 '울컥'했어요. 한 겨울 그 추운 거리를 돌아다니며 투쟁한 결과가 이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투쟁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죠." 조합원 이강희씨(51세. 제도조립과)는 지난 5월 '첫 월급'을 받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날 노조는 부사장 이하 모든 관리직 사원들에게도 급여를 지급했다. 부도 이전에 받았던 임금에 지난 99년 임금 인상분 10만원을 더한 액수였다.

"조합들의 웃음을 보면 이것 때문에 여태껏 참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주고받으면서 힘을 얻습니다." 전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웃음에서 보람을 찾는 듯했다.

* 노조 주도로 회사 일으키기

하지만 (주)마이크로의 노동자들이 웃음을 되찾기까지의 나날은 지난한 것이었다.
지난 97년 초 부도가 난 뒤 "조금만 더 참아달라"는 회사쪽 얘기를 듣고 참아온 3년여 동안 남은 것이라곤 2300%에 이르는 체불임금이었다. 지난 99년 7월엔 전면 파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회사의 경영 능력 부재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500여명의 동료들이 회사를 등졌다.
조합원 이강희씨는 "부도 전에 손이 부르트고 피가 나도록 일했던 것을 생각하면 억울해서라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당시 '남은 이들'의 심정을 토로했다.

거리에서 호소도 해봤다. 매일같이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시위와 농성의 나날이 이어졌다. 올해 2월 부당노동행위로 사장이 구속됐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노조는 결국 스스로 살 길 찾기에 나섰다. 사장 구속 직후 상급단체인 금속산업연맹의 이석행 부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관리직 사원까지 포괄하는 마이크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결성했다. 그뒤 곧바로 경영진으로부터 "회사 경영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각서를 받아 '자주관리'에 들어갔다. 회사 체계를 생산, 영업, 총무, 기획팀으로 재구성했다. 노조위원장은 영업팀장을 맡았다.

비대위는 우선, 계열사인 마이크로 세라믹의 도산을 인정받아 생활고 등으로 퇴사한 조합원들에게 3년치 퇴직금과 3개월분의 임금을 지급했다. 이어 정부로부터 고용유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미납된 고용보험료를 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부도 이후 3년 동안 연체된 보험료는 무려 4억1,000만원. 재원마련이 급선무였다.

버팀목이 된 전국 노동자들의 지지와 연대

"재고 물품을 팔아 밀린 고용보험료를 내고, 생산을 위한 자재대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부 조합원들은 이런 결정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해야하는 일이었고, 또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조합원을 설득했습니다."(구자현 노조 사무국장)

지난 2월 중순께부터 마이크로 노동자들은 2,000원, 3,000원, 5,000원짜리 세트로 포장한 재고 물품들을 나눠 들고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처음엔 창피한 생각에 말도 잘 안나왔어요. 처량한 생각에 눈물이 앞서기도 했어요." 인쇄부 조합원 김예자(49세)씨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민중연대 특판'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이크로 노동자들의 몸부림이 결코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을 갔을 때 관리직들은 나몰라라했지만 생산직 노동자들은 보는 이마다 격려하고 하나라도 더 팔아주려고 하더군요."(이인옥. 37세. 기술부 자동3과), "코카콜라 사업장에서도 너무 잘 팔렸어요. '힘내라'고 한마디씩 하면서, 너무나 분위기가 좋았어요."(양순애. 45세, 생산2과)

석달여만에 5억원어치를 팔았다고 한다. 민중연대 특판은 재원마련 뿐만 아니라 '연대의 위력'을 실감케 한 계기였다.

비대위는 판매 수익금의 일부로 체불된 고용보험료 중 연체료를 뺀 원금 2억3,000만원을 납부할 수 있었다. 또 자재를 들여와 부분적으로 생산을 재개했으며 그 결과가 지난 5월 중순께 지급한 14일치의 '첫 월급'으로 나타났다.

민중연대 특판의 성공은 또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협력업체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는 힘이 됐다. 공장 가동률도 점차 늘어나 이달 들어선 생산을 재개한 5월과 비교해 100%나 증가했다. 처음 12명이던 휴업 제외대상자도 이제는 87명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도시락과 라면으로 버텨온 조합원들에게 7월부턴 사내식당의 점심을 제공할 수 있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처음엔 적대적이던 일부 관리직 사원들도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이크로는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생기를 되찾아갔다. 전외숙 위원장은 "올해 안에 정부의 휴업수당 없이 임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 부채 해결이 핵심 과제

그러나 정상화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한 게 사실이다.
"이제는 보다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야 할 시점입니다." 전 위원장은 "그동안 전국의 노동자들이 보여준 지지와 연대가 이젠 장기체불 사업장 문제를 해결할 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다가온다"며 "여러 가지 방안을 두고 가능성을 타진 중"이라고 말했다.

향후 마이크로의 진로와 관련해 가장 큰 과제는 4,300억원에 이르는 부채다. 이의 해법 찾기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석행 비대위 위원장은 "매각 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지만 우선은 체불임금해소와 고용보장 등이 전제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자주관리를 지속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여기엔 채권단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마이크로의 노동자들이 이후 어떤 진로를 선택하게 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마이크로 노동자들은 요즘도 특판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농성 사업장 노동자들에 대한 지지방문을 겸해서 한다고 한다. "힘내시라"는 말과 함께 볼펜세트를 선물로 건네준다는 것이다. 지난 8일 명동성당 들머리 보건의료보조 농성장에서 만난 민중연대 특판부 소속 조합원 정수정(36세)씨는 "우리도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다른 사업장 투쟁을 외면하면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마이크로 노동자들의 민중연대 특판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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