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태(인하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도운 노무현 당선

21세기 첫번째인 이번 대선은 지역주의, 보스 권위주의, 부패 그리고 대미종속주의로 점철된 '3김 정치'의 시대가 마감하고 합리주의, 민주주의, 깨끗한 정치, 민족자존으로 가득찬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선거였다.

'3김 정치'의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이미 2000년 총선 무렵 낙천낙선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올 들어서는 '노무현 바람'과 '정몽준 바람'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주한미군의 여중생 '살해'사건에 대한 범국민적 항의시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386세대와 'X세대'로 불리는 20∼30대의 청년층이다. 이들은 최근에 급격히 확산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말로는 '3김 정치'의 청산을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고 때로는 부추기기도 하는 보수언론의 벽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실현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낙천낙선운동, 노무현 바람, 반미촛불시위의 중심에는 항상 이들이 있었다.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은 이러한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잘 읽어 적절한 선거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으나, 이회창 후보는 '3김 정치'의 청산을 외쳤으나 그것을 대체할 '새 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족 그리고 한나라당이 '변화의 대상'이라는 한계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노무현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새 정치'에 대한 국민, 특히 20∼30대의 열망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심했던 이들이 대거 노무현 후보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후보단일화협정을 맺고 공동유세를 해오는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이 투표전날, 그것도 대비책을 마련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는 법정선거운동 마감시간에 임박해서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함으로써 노무현 후보가 낙선의 위기에 빠지게 되자,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한나라당의 집권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민노당 지지자들이 대거 노무현 후보 지지로 돌아섰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오늘 정몽준의 (노 후보지지) 철회사실을 보고 오늘(투표일) 새벽 4시까지 고민을 했다... 노무현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는 민노당 지지자 속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다가 결국) 노무현 후보 개인에 대한 희망과 한나라당에 대한 지독한 불신 때문에 쓰라린 가슴으로 노 후보를 선택했다'는 내용의 글들이 부지기수로 올라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후보 지지로 선회한 민노당 지지자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직접 확인할 방도는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노무현 후보가 당내 재경선 요구와 보수언론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험담에 시달림으로써 지지율이 급락했던 시기에 시행된 (그래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노무현 후보가 아니라 당에 대한 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얻은 득표율과 이번 대선에서의 득표율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만큼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 지지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표> 투표율과 후보별 득표율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노동당의 선전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바람을 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유효투표수 2,476만명 가운데 약 95만표를 얻어 4%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1,201만표 48.8%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나 1,129만표 46.6%를 얻어 2위를 기록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권영길 후보의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거둔 성과는 득표율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우선, 민노당 지지자 가운데 '몽준의 막판 뒤집기' 때문에 '겉과 속이 모두 반노동자적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것을 우려해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는 100만에 가까운 득표를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노무현 후보의 안정적 당선을 어렵게 만든 '몽준의 변절'만 없었더라면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얻었던 득표율 8.1% 득표수 133만8천표 이상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이처럼 상당수의 민노당 지지자들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투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노당은 97년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 1.2%와 득표수 30만6,000표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득표율 1.2%, 득표수 22만3,000표를 얻는데 거친 2000년 국회의원 선거와 비교하면 이번 대선에서의 성과는 더욱 빛을 발한다.

사실, 이 두 가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익보수 정당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한국정치의 이념적 지평을 확장하고 흑색선전과 금권선거로 물들었던 선거문화를 이념과 정책에 근거한 대결로 바꾸는데 민노당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이 보수정당 후보들만 있었다면 이번 대선도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나, 이들 보수정당과는 이념과 정책면에서 확연히 다른 민주노동당이 있음으로 해서 보수정당 후보들의 이념적 정책적 특징이 더욱 부각될 수 있었으며 이번 대선이 역대 선거 중 가장 깨끗한 공정한 정책대결의 선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단 한번의 투표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선거제도 하에서 양강구도가 형성된 데다가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인해 당과 후보 모두 '반노동자적이고' '3김 정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승리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민노당 지지자들이 대거 노후보 지지로 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4%의 득표를 하고 3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노무현 후보 개인 속에서만 '새 정치'의 대안을 찾아 볼 수 있는 민주당과는 달리 민노당은 인물과 당 모두 '새 정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향후 정치구도와 노동자 정치세력화

정몽준 의원이 당내 충분한 논의도 없이 투표직전에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정몽준의 정치생명을 끝나버렸으며 따라서 보스 없는 국민통합21은 공중 분해되고 말 것이다. 한나라당 역시 포스트 이회창 체제 구축에 급급한 나머지 앞으로도 한동안은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위력있고 합리적인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새로운 지도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칫 자민련류의 친미종속 극우반공주의자들의 집단과 온건우익집단으로 해체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새로운 활로를 찾기 전까지 이전처럼 '분할정부'의 행정부 수반인 노무현대통령의 흠집내기에 열중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집권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을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할 세력이 전무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깨끗하고 개혁적이라 하더라도 민주당내 부패한 보수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내의견을 무시하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빗발치듯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한 바대로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2004년 총선을 계기로 구세력을 '노사모'의 신진세력으로 교체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신이 대선후보가 될 수 있게 한 당내경선제도를 적극 활용할 것이다. 다만, 총선 전까지는 지금의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민주당이 노 후보의 당선을 가능케 한 국민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데 한계를 보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재벌정책이나 노동정책, 조세정책, 대미정책 등에서는 노무현 후보조차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새 정치'의 주도세력이 됨과 동시에 실질적인 '제1야당'의 역할을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새정치'의 새로운 대안세력이 될 수 있음을 국민들로부터 확인 받았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얻은 '표면상' 낮은 득표율에 실망하지 말고 새 정치의 주도세력으로서 실질적인 제1야당으로서 정책개발과 인물양성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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