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는데 한군데도 상처가 없는 거야.
피 흘린 데도 없고 머리에 붕대 감은 것도 그대로고."
하루 전 병동을 찾을 때만해도 "죄송합니다. 나가면 효도 잘하겠습니다"며 영어의 몸에다 병원신세마저 지고 있는 모습을 못내 미안해하던 아들 박창수는 병원 앞뜰에 평소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버지 황지익씨(66세)은 10년도 넘은 91년도 5월 당시 상황을 생생히 그려낸다. "경찰이 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몸 구석구석을 사진을 찍었지" 경찰들의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도 황씨는 아들의 마지막을 부릅뜬 눈으로 지키고 있었다. "검사가 나중에 사진 다 보여 준다고 했는데…." 그러나 죽음의 진실과 함께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다. 감춰진 사진과 함께 아들의 죽음도 10년 동안 역사의 뒤편에 묶여 있어야 했다.

병원 벽을 부수고 들어온 전경들은 아들의 육신을 빼앗아 갔다. 자신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부검이라는 마지막 수단마저 빼앗긴 아들은 한 줌의 재가 돼 돌아왔다.

황씨는 "창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이번에도 밝혀지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는 거하고 똑같은 거야. 노동자 탄압한 것이 밝혀져야 노동자 권익을 찾는 거지. 그게 안되면 옛날하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거야"라고 말한다. 황씨는 한달 남직 남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박창수 열사의 죽음은 일본 법의학자 가미야마 시게타로 박사가 지난 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제출한 감정서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그가 당시자료를 근거로 자살이 아닌 구타 등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 민주노총 진상규명위 활동연장 촉구

의문사 이대로 묻을 수 없다
주검마저 찾을 수 없었던 죽음도 있다. 92년 수영기계에 다니던 박태순씨가 실종됐다. 가족들은 10년 동안 박씨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 왔다. 결국 지난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씨가 당시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기무사의 사찰을 받고 있었다는 것 이외에 그의 죽음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박씨의 누나 희순씨는 "이미 한줌의 재로 변해 납골당에 안치돼 있던 동생을 작년 8월에야 모란공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며 "가족들이 겪은 10년 동안 고통과 의문에 싸인 동생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 진상규명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경찰도, 검찰도, 법의학자들도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죽음에 관여했거나 조사를 벌였던 기관들이 진상규명위의 접근을 막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다. 진상규명위의 법적 조사기간이 다음달 16일 종결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6일 기자회견을 갖고 관계기관들의 자료공개를 촉구했다. 또한 진상조사위의 권한강화와 조사기간 연장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또 당시 사건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국정권, 검찰, 국군기무사 경찰청 등 피진정기관들에게 자료공개를 촉구하기 위해 7일 국정원을 시작으로 항의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진상규명위의 한 조사관은 "국정원 등 피진정기관들이 의도적으로 조사관들에게 협조하지 않아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7일 진상규명위원들을 직접 국정원에 보내 실지조사를 벌일 계획이어서 국정원의 대응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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