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에 '마라톤 바람'이 불고 있다.

'42.195Km' 인간 체력의 한계를 극복해야 뛸 수 있는 거리. 우리에겐 지난 93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56년 만에 금메달을 딴 사건으로 오래 기억돼 있다. 양손을 올리며 결승선을 넘던 감동을 직접 체험하고 싶기 때문일까.

최근 마라톤은 '붐'을 이루고 있다. 대한육상연맹에 따르면 3월 초 현재, 마라톤 동호회 수만 500개가 넘고 동호인은 100만 명에 이른다. 사정는 노동계도 마찬가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노동계에도 진작부터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이 있다. 어떤 경우는 '무리'를 지어 또 어떤 이는 혼자서 뛴다.

■ "달리기는 나에게 삶이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출장에, 밤샘회의로 지쳤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노하우로 20Km는 그런 대로 왔지만 30Km를 전후해선 그야말로 '헉!헉! 미치겠다'는 심정뿐이었다. 이때부터는 1Km가 매우 길게 느껴지기 때문에 1Km 구간마다 한가지 주제를 정해 스스로 최면을 건다. 딸 희원이를 먼저 떠올린다. '희원아, 너희가 자라서 살아갈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위해 아빠가 열심히 일하마' 이를 악문다. 호흡이 불규칙하다. 정말 힘들 때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주제가 남았다. 악덕병원사용자들의 이름과 장기투쟁하고 있는 조합원들. 그리고 마음으로 소리친다. '이기고 말 것이다!' 그렇게 또 1Km를 등뒤로 남긴다.

달리기 '꾼'인 보건의료노조 나영명 조직국장이 달리는 중간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나름의 비법이다. 수년 동안 꾸준히 달려온 그는 이제 프로다. 하프코스 3번, 풀코스 3번 모두 6번의 대회에서 완주했다. 그의 최고 기록은 올 3월 서울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 4시간 14분 12초.

"나에게 마라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이고 활동력의 원천입니다. 나는 한 시간 덜 자더라도 한 시간 뛰어야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감과 활력을 만들고, 건강도 얻죠." 나 국장이 마라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눈빛은 '맑음'이다.


보건의료노조 내 또 한 명의 마라톤 '광'이 있다. 이주호 정책국장(사진 小). "묻지 말고 뛰어 보세요. 뛰어본 사람만이, 그리고 완주해본 사람만이 그 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뛰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왜 달리는지 몹시 궁금했다. "내 나이 불혹을 바라보면서 문득 돌아본 나의 삶, 우리의 운동 모습…." 이 국장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달리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가 앞을 보고 뛰는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레 변했다. '풀코스 3번, 하프코스 4번' 이 국장의 대회 참가 기록. 이 국장은 마라톤 대회에 나가 발톱이 두 번이나 빠졌는데도 뛰는 것이 마냥 즐겁다.

그러나 달리기 광인 이들 두 간부는 최근 석 달 동안 동네 한바퀴도 돌지 못했다. 병원 파업으로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합숙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즘 꿈에서만 달린다.

■ "우리도 뛴다" 마라톤으로 얻는 '단결'

숨이 턱에 차고, 입에서 거품이 생기고, 발바닥이 화끈거리다가 물집이 생기고…

"아! 내가 왜 뛰고 있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 끝까지 뛰어야 한다는 마음이 한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교차한다.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니다. 이기면 완주하는 것이고, 지면 주저앉는 것이다.

민주노총 오동진 쟁의국장은 "포기하고 싶지만 실패했을 때 참담함을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다"고 말한다. 노동운동가라는 자존심으로 첫 고비를 넘기고 이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냥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완주다.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다.

민주노총 사무총국에는 오동진 쟁의국장, 최승회 사무차장, 김정근 조직국장이 '달리기' 멤버다. 모두 43세 이상의 '고령(?)'이다. 이들의 모임은 민주노총이 지난해 5·1절 마라톤을 개최하면서 시작했다. 최승회 차장이 적극 제안했고 그런 만큼 가장 열심이다. 점차 회원이 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10명. 매주 두 번은 뛰려고 한다며 보통 고참회원은 10∼15Km, 신입회원은 5Km를 뛴다.

"마라톤은 막상 혼자서 뛰기는 힘듭니다. 한번 끊기면 다시 시작하기가 만만치 않거든요. 모임이 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겁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같이 뛰는 '동지'가 있기 때문에 '달리기'는 1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민주노총 사무총국 팀은 보건의료노조 두 간부에 비해 '초보'다. 오동진 국장, 김정근 국장, 최승회 차장이 공식대회 하프코스에 2∼3번 참가했다. 풀코스는 '아직'이다. 조만간 도전해 볼 생각이다.

'프로'이든 '초보'이든 이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은 마라톤으로 얻는 '건강'은 부수적이라는 것이다. 자신감, 열정, 희망…. 보다 근본적인 감정들이 이들을 '달리기 중독자'로 만들고 있었다.

공공연맹 양한웅 위원장 직무대행, 금속산업연맹 오종쇄 부위원장도 노동계 내 '달리기 맨'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밖에 데이콤노조가 지난 94년부터 올해로 8년째 노동절을 기념해 마라톤대회(사진 ?)를 열고 있다. 보통 조합원 등 700∼8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다. 서울지하철노조도 각 지부별 체육대회 때 빼놓지 않는 종목이 마라톤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민주노총이 지난해 개최한 노동절 마라톤대회에서 남자부분 2, 3등을 차지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한국노총 금융노조가 올해 두 번째 '거북이 마라톤'을 개최하고 있으며 대한항공노조, 국민연금노조가 지난해 각각 마라톤 대회를 열었다.

"내딛는 첫발, 정체된 삶도 함께 뛴다"

■ 마라톤과 노동운동은 '닮은 꼴'

"노동운동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하는 겁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예요. 멈추지 않고 꾸준히 달리다 보면 골인지점에 도달하듯이 노동운동도 꾸준히 해야죠." 오동진 쟁의국장은 마라톤을 노동운동과 자주 빗대어 본다. 뛰면 뛸수록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보건의료노조 나영명 국장도 비슷한 지적이다.

"노동운동은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조급해서도 안되고, 무기력해서도 안됩니다. 정성을 다하고 우직하게 신념을 지키고 모자란 것은 채워나가며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이고 운동입니다. 달리기도 똑같아요."

이주호 국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마라톤이 공동체,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노동운동의 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마라톤은 혼자 달리기 때문에 얼핏보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운동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집단적인 운동입니다. 함께 연습하고 시합당일 함께 뛸 때 서로 격려하면서 완주할 수 있거든요." 이 국장은 보건의료노조 차원에 동호회 발족을 준비중이다. 노조 동호회가 기틀을 갖추면 민주노총 차원으로 확대를 제안한다는 야심도 갖고 있다.

"뛰는 것 자체가 연대죠. 마라톤대회에는 그 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조합원들, 비정규직 노동자, 다른 노조 노동자들, 임직원조차 함께 뜁니다." 마라톤은 이들이 구호로 외쳤던 '단결'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데이콤노조 강효철 교선실장은 한마디 덧붙인다. "지난해 임신 5개월 된 여성 조합원이 출전해 꼴찌를 했지만 5Km를 완주했습니다. 감동이었죠. 그녀가 결승선을 순간 모두들 기뻐 덩실덩실 춤을 췄습니다. '하나'가 된 거죠."

노동계 '마라톤 바람'은 서서히 '돌풍'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비록 뛰는 동안 숨은 턱에 차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나누며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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