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얘기를 꺼내는 게 너무 한가롭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을 법하다.
장기파업 중인 사업장이 적지 않아서다.
하지만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도 적당한 휴식과 여가는 뺄 수 없는
생활의 요소다. 더욱이 여름 휴가철이다.
노조활동가들의 이유 있는 취미생활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산행을 좋아하는 것이 뭐 특별하게 자랑하거나 내세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무더운 삼복더위 속에서 생존권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괴심마저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향이 시골 산동네 촌놈 출신이라 어릴 적 나무지게를 지고 이산 저산을 뛰어다니면서 땔감을 구하기도 하고 산토기를 잡으러 눈 덮인 들판을 뛰어 다니며 자랐다.

등산을 좋아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산을 찾기 시작한 것은 지하철에 입사해서 88년 지회장을 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89년 3월 파업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몇 개월 머무는 동안 나는 태백산맥,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등을 읽으면서 출소하면 제일 먼저 지리산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나는 수년동안 지회 간부들과 함께 지리산을 연례 행사처럼 가곤 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경험한 광활한 운무 속의 일출은 더 이상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감격적이다.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누적된 스트레스, 그리고 많은 갈등들, 때로는 도피하고 싶은 현실 속에 힘들어할 때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국면을 이겨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산행은 더없이 소중하다. 몇 시간 술자리만으로는 부족한 가슴을 여는 데는 역시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높은 산을 1박이나 2박 일정으로 가는 것이 제 맛이다.

총총한 별밤 산 속에서 마시는 술 한잔의 맛은 기가 막힌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서슴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산이 베푸는 넉넉함이 아닐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동지들과 가슴으로 만나고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런 경험은 산행 속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아닐까?

산 이야기하면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흔적은 지금 나의 반쪽인 마누라를 처음 만나서 '찜'했던 바로 서투노협 등반대회. 한여름 어느날, 안개바람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시야를 가리다가 금새 청명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치악산 비로봉에서 커피 한잔을 놓고 진솔한 시간을 가졌다. 치악산 비로봉을 올라갈 때에는 각자였지만(손도 잡지 못했다), 하산 할 때에는 손을 잡고 있었던 만큼 중요한 결단을 한 곳이 바로 치악산이었다.

그 후 우리는 신혼여행지로 설악산을 갔다가 다시 남원으로 내려가서 뱀사골에서부터 노고단까지 하루종일 걸어서 노고단 산장에서 일박을 혼숙(?)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비행기를 타지 못할 신분상의 이유가 있어서 불가피 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등산 한 것인지 신혼여행 간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극기훈련을 하고 온 셈이다.

요산요수라 했던가?

산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서거니 뒤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정겹게 느껴진다. 건강을 위해서 거의 매일 가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저미는 안타까움과 마음의 상처를 삭이기 위해서 외롭게 혼자 산을 타는 사람들도 있다. 실업자의 아픔이나 고통을 안고 산에 오는 사람, 자신과의 결단을 위한 계기로 생각하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산은 반겨주고 안아준다. 여럿이서 가는 거나 혼자서 가는 거나 다 유익하지만 최근에는 혼자 가는 경우가 더욱 많아진 것 같다.

나는 등산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보지 못한 산을 더욱 동경하게 된다.

이번 여름에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아들놈을 데리고 덕유산을 갈 계획으로
컴퓨터에 빠져 있는 녀석을 꼬시고 있는 중이다.
사는 것이 뭐 대단한 거냐 아등바등 너무 집착하는 것보다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살아가라고 가진 것은 없지만 더불어 함께 살자고 되뇌며
나는 지금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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