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24일자 노동부 노사정책실의 황우찬 서기관이 보내온
기고문 '노동계의 산별교섭 요구에대한 몇가지 제언'(가기)에대한 반론글입니다.


한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 월드컵 16강이 보인다고 온 국민(물론 필자도)이 흥분하던 그날 밤 필자는 병원에서 산별교섭이 속속 타결되는 결과를 보면서, 이제 산별교섭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음에 또 다른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월드컵에 웬 파업' '환자불편' '불법파업' 이라는 집중포격을 뚫고 쟁취한 것이라 더욱 값지다. 노동운동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정부와 노동부의 태도는 실망 그 자체다. 여전히 산별교섭에 대해 입장은 시기상조론 또는 불가론이다.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민주노총의 전투적 기풍이 바뀌지 않는 한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이런 공식, 비공식적 입장을 듣던 차에 마침 매일노동뉴스에 노동부 황우찬 서기관의 기고문을 보고 산별교섭에 대한 정부와 사용자의 잘못된 몇 가지 편견과 오해에 대한 비판하고, 더불어 토론의 활성화를 위해 펜을 들었다.

■ 산별교섭 왜 필요한가…지금의 노동현장을 보라
산별교섭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여기서 구구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외국에서는 보편화된 교섭구조로서, 교섭비용의 문제, 노사갈등의 축소, 노사문화의 개선,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 노조 역할 재정립을 통한 사회기여도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산별교섭이 왜 필요한지를 더 보여주는 것은 지금 노동 현장이다. 민주노총은 조합원 60만중 40%가 산별노조 소속으로서 이미 산별노조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산별교섭이 구체화되고 있다. 전교조는 이미 교육부와 산별교섭을 하고있고, 금속, 사무노련, 택시, 금융노조 등이 완전한 산별교섭은 아니지만 기업별교섭을 뛰어넘는 초기업적 산별, 집단교섭이 활발하다.

최근 경총이 사무노련 증권사노조와 집단교섭을 하기로 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현장 외곽에서의 움직임도 주목할만하다. 지난 3월 29일 원주에서 열린 '노사정 포럼'에 참가한 노동 관련 지도자와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기업을 뛰어넘는 다양한 대화 틀'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올해 중앙노동위원회는 병원 파업을 막고 평화적 분쟁해결을 위한 최종 조정안으로 '노조가 요구할시 산별교섭에 응한다' 라는 조항을 제시했다. 이런 거대한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고 있는데 아직도 산별교섭은 안된다고 하는 사람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사람'이다.

필자는 정부관계자와 사용자들과 면담하는 가운데 산별교섭을 둘러싼 핵심 논점은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산별교섭 이후 노사관계 전망에 대한 가치판단'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산별교섭 논의가 보다 솔직해지고 발전하려면 논쟁에서 '숨어있는 1인치의 비밀'을 찾아야한다. 그것은 바로 '노조의 전투성과 힘 강화'에 대한 우려이다.

정부와 사용자는 '산별교섭 보장 = 노조 힘 강화 = 전국 총파업'을 우려하면서 투쟁하는 노동조합에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리고 정말 그렇다고 하면 노조강화는 사회악인가? 여기에 산별교섭 논쟁의 핵심이 담겨있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 사용자·정부는 '산별교섭은 전투성 강화' 인식부터 버려야
먼저 '노조의 전투성'에 대해서는 외형적 결과보다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지금의 노조들이 전투적으로 되었는지, 필자는 그것이 단지 지도부의 노선과 의지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의 오랜 노사관행에서 생겨난 문화이다. 그런 문화가 생성된 근본원인에 대한 진단과 제거 없이 외형적 모습만 보고 '산별교섭= 전투성 강화' 로 연결시켜 산별교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해법'이다.

전투성에 대한 우려는 산별교섭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할 문제이다. 노조의 전투성이 진짜 문제라면 노조가 '즉자적 전투성'을 뛰어넘어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을 자기 화두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교섭구조의 변화등 총체적인 노동환경 변화를 적극 고민해야한다. 노조의 전투성에 대한 단기적, 졸속적 대응이 계속 노조의 전투성을 확대 강화하고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산별교섭 = 노조 힘 강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도 문제다. 이것은 '이 가뭄에 웬 파업' '월드컵에 웬 파업' 이라는 비난과 함께 노조와 파업권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반영하고있다. 정말 노조는 사회불안세력이고, 파업은 사회악인가? 반대로 노조 약화가 사회안정인가? 한국이 월드컵을 통해 선진국 도약을 꿈꾼다면 노조와 노동기본권에 대한 인식도 선진국형으로 함께 바뀌어야한다. 노조와 파업권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결코 민주적 자세가 아니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노동기본권 보장 없이 질 높은 민주주의, 경제강국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유럽등 선진국 노사관계와 민주주의 역사의 교훈이다.

노조 건설을 통해 직장내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각 부문에서 사회 민주주의가 확대되어온 사회적 순기능은 무시하고 일시적 파업으로 인한 손실 때문에 무조건 파업불가를 외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노조 힘 강화는 단지 노조 집행부의 강화가 아니라 사회 민주주의의 강화로 이해해야하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힘의 균형을 통해 민주주의는 성숙되는 것이다. 더 크고 안정된 힘이 있을 때 노조는 유연함이 생기고, 책임감은 더욱 높아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보아야한다.

■ 방법론은 "노사협의로 충분"…노조내부 문제는 '노력' 필요
산별교섭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보되면 산별교섭을 둘러싼 쟁점 중 방법론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 '이중교섭의 문제, 임금격차의 문제'는 산별교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사간 협의가 가능하다. 따라서 본말이 전도되어선 안된다. 그런 문제는 노사간 대화를 통해 하나씩 풀어갈 문제이지 그런 문제 때문에 추진을 하지 말자는 것은 결국 하지 말자는 것과 동의반복일 뿐이다.

또, 제도개선사항이니깐 노사정위에서 논의하자는 말은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노사정위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이미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고, 최근 노동계에선 노사정위에서 논의하자는 말은 결국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말로 동일시하고 있다. 단계적으로 접근하자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94년부터 산별교섭을 요구해왔고 그동안 온갖 노력과 실험을 해왔기에 굳이 단계적으로 따지자면 이젠 본격 추진할 단계에 이르렀다.

산별교섭이 안 되는 또 다른 근거로 외국의 분권화를 들고있는데, 이는 한국의 현실과 정반대이다. 유럽에서의 산별교섭 분권화 현상은 산별교섭 수준이 90-100%에서 일부 지역과 공장단위에서 교섭의 효율화를 위해 분권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을 산별교섭 수준 0%에서 20%로 끌어올리고 있는 한국 현실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은 공공병원이 10%밖에 안되는 한국이 그나마 있는 공공병원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그 정당성을 공공병원이 90%이상을 차지하고있는 나라도 민영화한다고 강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황 서기관이 지적한 노조내부의 문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 문제는 겸허히 받아드리며 노동계는 이런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산별노조 본조와 지부간 관계정립과 교섭안건의 배분문제, 복수노조 하에서의 교섭창구문제, 임금 등 노동조건 격차해소를 위한 노동 내부의 연대전략, 차이를 넘어서서 단일한 산별협약의 준비 등은 전적으로 노조 몫이다. 그리고 산별교섭을 하자고 윽박지르는 식을 넘어 노사간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조는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 노사관계 16강도 함께 고민해야
마지막으로 황 서기관이 지적한 산별교섭이 월드컵을 볼모로 꼭 따야 할만큼 중요한 요구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산별교섭과 월드컵 성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월드컵 개최국으로서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되는 '동시적 과제'라고 말하고 싶다.

월드컵 16강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노사관계 국제경쟁력이 49개국중 46위인 현실에서 노사관계, 노동기본권 16강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16강으로 가는 핵심전략은 ▷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노사정 대화의 틀 확립과 ▷ 산업별 차원에서의 산별교섭 틀 ▷ 현장단위에서 노조 경영참여보장을 통한 신뢰회복이다.

이후 산별교섭과 노사관계 개혁과제에 대한 보다 활발한 토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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