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서귀포 중문연습경기장.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 대비한 마지막 연습을 하는 선수들의 표정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황선홍·설기현 등 스트라이커들은 골결정력을 높이느라 슈팅연습에 열을 올렸고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은 조직력을 가다듬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바로 그때 운동장 한 구석에서 대표팀의 김대업 주무가 ‘황당한’ 비화를 공개했다. 18일 오후 노동부의 한 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전화내용은 “월드컵 기간에 파업을 계획하고 있는 노동단체들에 자체요청을 할 수 있도록 히딩크 감독과 선수 1명을 서울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월드컵 개막까지는 불과 10여일. 대표팀에는 훈련과 평가전 외에는 다른 일에 신경쓸 시간이 없고 김주무는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래서 바뀐 요구는 “사인볼이라도 보내달라”는 것. 대표팀은 저녁시간 짬을 내 축구공 4개에 ‘노·사·정 화합을 기원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대표선수 전원의 사인을 담아 노동부측에 전달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월드컵은 세계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이다.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를 잘 치르겠다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목표다. 이런 대회를 앞두고 노동단체들이 파업을 벌이겠다고 하면 정부에 비상이 걸리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최국인 한국의 대표팀이 좋은 경기를 벌이는 것도 월드컵 성공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 선수와 감독은 최상의 전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본분이다. 외국인인 히딩크 감독과 운동밖에는 모르는 선수들이 어떻게 파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월드컵을 앞두고 이를 볼모로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측이나 이들을 파업문제 해결에 동원하겠다는 정부측 발상이나 모두 국민적 바람인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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