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발전노조 파업 지도부가 38일째 농성하며 파업을 이끌었던 명동성당에는 긴박감이 사라졌다. 그러나 텐트 4동과 이호동(37·사진) 발전노동조합 위원장의 한숨은 남아 있었다.

노·정간의 대타협에도 불구, 동틀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던 이위원장은 6시30분쯤 자리를 털었다. 노동운동사 최초의 ‘산개투쟁’ 방식을 선보이며, 3900여명의 ‘흔들림’없는 대오를 꾸려온‘한 인물’ 의 얼굴에는 피로감 이상의 무엇이 어려 있었다. 민영화 철회라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일부 노조원들의 반발, 344명에 이르는 해고자, 노조 지도부 체포영장이란 그늘이 엿보이는듯 했다. 개인적으로는 해고와 경찰조사, 가정경제의 파탄등 3중고가 그를 옥죄고 있다. 이위원장은 “명동성당은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노조원이 해고될땐 마치 수족이 잘려나가는 심정이었다”고도 토로했다.

직장복귀 노조원들과 미복귀 노조원들이 대립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가’ 라는 갈등도 꼬리를 물었다. 지난해 7월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이후부터 단 하루도 편안할 수 없었다. 가족의 고통도 슬픔이다.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같이했던 부인 심효순(34)씨는 “1차로 해고된 뒤 월급은 한푼도 나오지 않았고 저축한 돈마저 다 까먹었다”고 울먹였다. 민주노총 연대파업 돌입 10분을 남겨놓고 작성된 합의문을 보고, 이위원장은 “절망감에 몸부림쳤다”고 심경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복귀자 전원해고라는 ‘위협’ 은 감당할 수 없었다. 노조원들의 피로감도 한계점에 다다랐다. 현실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결론은 합의안 수용이었다.

그의 텐트에 걸린 ‘현명한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씨앗은 먹지 않는다’ 는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노동부장관 자리가 수명을 단축시키는 곳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70∼80년대 노동운동계의 대부로 노동부 수장에 오른지 66일째인 방용석(57)노동부장관은 2일 오전 협상이 끝나갈 무렵 며칠간 계속된 밤샘협상으로 지쳐있었다.

지난 1일밤 가장 민감한 ‘민영화’ 관련 합의문 문구를 조정하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400호 협상장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민주노총과 발전노조 협상대표들이 “(노동계)선배입장에서 왜 하나도 도와주지 않느냐”며 격하게 항의하자 “너희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다”라는 방장관의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과거 관료나 학자 출신의 노동장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하는 운동권 선배 방장관에게 노동계 후배들이 야속하다며 몰아붙인 것이다.

방장관 역시 노동계 후배들에게 서운한 점이 적지 않았다. 발전노조가 지난 2월25일 파업돌입 직전에 ‘민영화’ 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 파업은 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철석같은 약속을 ‘배반’ 했기 때문이다. 노동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방장관은 “당시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방장관 일행은 귀가도 못한채 서울 을지로 프레지던트호텔에 투숙한채 민노총과 끈질긴 협상을 계속, 지난달 30일 타결의 물꼬를 텄다. 민주노총 2차 연대총파업 직전 막판 협상 타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동부의 김윤배 기획관리실장은 “발전노조 파업사태로 가장 가슴아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방장관의 고뇌어린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참모로서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방장관은 2일 마지막 민영화 합의서 문구와 관련, 산자부 등을 설득해 타협을 성사시킨 뒤에도 밝은 웃음 대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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