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정책평가위원회가 주관한‘2000년 상반기 정부업무 심사평가 결과 보고회’가 열렸다. 이 긴 이름의 회의를 연 정책평가위원회는 국무총리자문기구라고 한다.

이 기구가 얼마나 센 지는 몰라도 하여튼 지난 상반기동안 정부가 한 일이 이것도 미흡하고 저것도 미흡하다며 부처별로 꼬집어 놨다. 미흡 지적을 받은 부처와 장관들은 심사가 편치 않았는지 보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잘한 일도 많은데 잘못한 일만 부각시켜야 되겠느냐고 일부 반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번 보고회의에서 특히 관심을 집중시킨 대목은 정부가 추진하는 2차 금융구조조정이 새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는‘부실금융기관 살리기’에만 급급했다는 지적이다. 금융지주회사법이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구조조정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벌써 혹평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고 재경부와 금융감독원이 이 자문기구를 원망만 할 수 있나.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2차 금융구조조정의 기본 방향은 이미 다 알려졌고, 특히 지난 11일 금융파업을 하루만에 끝내면서 발표한 금융노조와 정부사이의 합의문에는 그 대강이 나와 있다. 이 방향과 대강에 따르면 정책평가위원회의 사전 평가가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무수하게 논의된 금융개혁을 그 보는 각도를 달리 하여 소비자의이익과 합치되는 것인지 또는 국민 만족도를 높이는 개혁인지 검토해 보자

. 그러면 개혁이 한참 동떨어진데서 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두집 걸러 한집 꼴로 들어선 각종 금융기관 가운데 소비자가 좋아하는 금융기관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가령 은행을 예로 든다면, 첫째 딴 은행보다 안전하고, 둘째 딴 은행보다 서비스가 좋고, 셋째 딴 은행보다 예금이자는 비싸게 주고, 대출 이자는 싸게 받는 즉 경쟁력 있는 은행이어야 한다. 금융개혁은 이런 은행을 만드는 작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세가지 조건 가운데 서비스를 높이는 방법은 은행들이 알아서 추진할 일이지만 안전은행, 경쟁력 있는 은행 만들기는 정부의 규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이 두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매우 무심하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역작용을 한다는데 있다.

안전한 은행, 즉 내 돈을 떼먹을 것 같지 않은 은행은 부실채권의 비율이 낮아야 한다. 정부는 올해 초 우리 시중은행의 부실채권이 91조원 가량 된다고 추산했으나 얼마 전 한국경제연구원은 120조원 또는 150조원이 된다고 했다.

그러자 정부는 그런 추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은행 부실을 투명하게 밝혀 안전한 은행을 만들어야 할 정부가 정부 추산보다 오히려 더 신빙성이 있을 수도 있는 계산을 공박하고 있다. 은행 부실을 축소하거나 감싸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정부는 누구 편일까.

경쟁력 있는 은행 만들기에 관한 한 정부는 완전히 반경쟁적이다. 경쟁력은 자연히 길러지는 것이 아니고 우선 은행끼리의 경쟁에 불이 붙어야 한다. 또 그 경쟁심은 경영 주체가 확실해야 나온다. 예금을 받건 대출을 해주건 딴 은행보다 고객에게 유리한 조건의 이자를 제시하는 것을 금리경쟁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은행간 경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국의 시중은행들이 금리경쟁을 벌였다간 당장 당국에 호출돼 야단을 맞는다. 당신 은행 혼자서 튄다고 잘 되겠느냐는 반경쟁적 훈시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공정거래위원회가 그 당국을 경쟁제한행위 교사혐의로 고발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정부는 특히 은행에 임자가 들어서는 것을 싫어한다. 은행 주인 안찾아주기가 정부 금융정책의 큰 줄기다. 은행 소유주식 상한선은 4%인데 이것으로는 누구도 지배주주가 될 수 없다. 정부는 이 규정을 고칠 생각을 전혀 안 한다. 임자 없는 은행은 안전하지도 않고 경쟁력도 떨어진다.

정부는 오로지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은행을 대형화, 겸업화시키면 경쟁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소비자의 니즈(needs)와 따로 노는 금융개혁은 아무래도 공허할 것 같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