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저출생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담론이지만 수십 년째 정부와 정치권은 헛발질만 하고 있다. 이젠 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진정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지난 16년 동안(2006~2021년) 280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합계 출산률이 매년 하락해 “헛돈을 썼다”고 비판해 왔다. 조선일보는 2018년 12월12일 주경철 서울대 교수 칼럼에서 “장려금 지급 등의 설익은 정책에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이 칼럼에 ‘고대 스파르타식 저출산 해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제목을 달았다.

이처럼 출산을 장려하는 단기 재정 투입에 반대했던 조선일보는 3월19일 5면엔 ‘경남 통영 멍게수협 출산 땐 1호봉 승급’이란 기사에서 “저출생 위기 극복을 위한 민간 차원의 출산 장려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2월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출산한 직원 자녀 1인당 현금 1억원을 지원하는 출산 장려책을” 시작으로 “(여러) 기업 동참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강원 강릉시 썬크루즈 호텔&리조트가 자녀 출산 직원에게 5천만원을, 경남 창원한마음병원이 출산 축하금 100만원을, 부산에 있는 경남정보대와 동서대가 500만원씩 출산장려금을 준다고 소개했다.

급기야 조선일보는 경남 통영의 멍게수협이 자녀를 출산하는 직원들에게 ‘1호봉 특별 승급’해준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시를 통합해 14만명으로 출발한 통영시 인구는 꾸준히 줄어 올해 11만명대로 떨어졌다. 인구 11만명대의 통영에서 수협에, 그것도 멍게수협에 다니는 직원이 얼마나 된다고, 그들에게 호봉 승급의 현금성 장려책을 사용하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기사를 써대는지 모르겠다. 저출생 예산은 물론이고 복지정책을 펼 때마다 아무 효과도 없는 ‘현금 살포’라고 맹비난해 온 조선일보가 이런 기사를 쓰다니.

그동안 언론이 자동문장완성처럼 즐겨 사용해 온 ‘저출산 예산에 280조원 헛돈 썼다’는 보도는 사실일까. 2019년 저출산 예산과 직접 관련된 아동수당이나 육아휴직급여, 보육서비스 등 ‘가족지출’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12%인데 반해 한국은 1.37%로 턱없이 적다. 헛돈 280조원은 상대 정파의 실정을 부풀리려고 내놓은 참주선동일 뿐이다. 언론은 이를 확인 없이 마구 받아썼다.

정부가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을 첫 시행한 2006년 2조1천억원을 시작으로 해마다 저출산 예산은 크게 늘었지만 주거지원 예산을 뺀 실제 저출산 예산은 2015년부터 정체되고 있다. 주거지원 예산 때문에 저출산 예산이 과도하게 부풀어 보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언론은 반대 정파를 비난하는 데 저출생 정책을 이용할 뿐, 진정한 저출생 문제 해결엔 관심이 없어서다.

고용노동부가 3월18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연 ‘일·생활 균형 세미나’ 보도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는 다음날 14면에 ‘근로자 절반이 유연근무 희망’이란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유연근무제는 저출생 문제 해결에 일부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것만으로 저출생을 모두 해결할 순 없다. 반면 유연근무제는 저출생과 관련 없이 총자본의 일치단결된 목소리다.

정부가 저출생 대책으로 유연근무제 활성화를 적극 추진해도, 정작 사용 가능한 노동자는 대기업과 정규직에 불과하다. 노동시장부터 균형을 맞춰야 유연근무제가 조금이라도 저출생 대책으로 작동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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