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수년 전, 일하다 무릎을 다쳐 우리 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노동자가 있었다. 명백한 사고였기에 산재 승인은 어렵지 않게 이뤄졌지만 얼마 후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이 발병했다. 바람만 스쳐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통증’이 유발된다는 희귀질환이다. 업무 관련성을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질환이었지만 사고로 인한 부상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었기에 장해급여를 신청했고 다행히 승인됐다.

그런데 장해판정을 받을 당시 그가 겪은 일은 충격적이었다. 장해판정을 받으러 간 그는 자신을 ‘검사’할 공단 자문의에게 “CRPS환자이니 제발 무릎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사전에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무릎부터 만졌고 그는 그 자리에서 통증으로 혼절했다. 잊고 지내던 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노동안전보건단체들과 함께 산재보험 특정감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지난달 말 노동부는 산재보험 특정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부정수급, 추정의 원칙의 불명확성, 높은 장기요양비율 등의 문제를 밝혀냈다며 대책으로 산재보험 제도개선TF를 발족했다. 후속조치들이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노동부의 행태에 대한 비판과 산재보험 개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요동치고 있다.

이러한 격한 반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특정감사 결과 그토록 떠들던 ‘산재 카르텔’은 실체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노동부는 ‘답정너’식으로 이미 정해진 결론을 발표했다. 더구나 후속대책을 논의한다는 산재보험 제도개선TF는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조차 공개를 거부한 채, 재계를 대변하는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는 소식만 전해진다. 처음부터 산재보험 개악을 위한 수순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다. 또한 이러한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것은 과거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2006년에도 정부는 산재노동자의 부정수급 문제, 장기요양 문제를 거론하며 산재노동자들을 ‘도덕적 해이’로 몰아갔다. 그 시절에는 카르텔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전이었던 모양이다. 정부는 이듬해부터 산재보험 개악을 통해 장기요양을 강제종결시킬 수 있도록 하고, 휴업급여 수준을 낮췄으며, 장해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이 ‘진짜’ 장해인지 재평가하는 절차를 만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의 그는 2008년 개악된 산재보험 제도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장해 재판정을 받아야 했을 테니 대략 2년 전쯤 그 수모를 다시 겪었을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런 야만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그들에게 산재노동자들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었다.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정도의 통증을 호소하는 노동자는 꾀병이 아닌지 의심하고, 소음성난청인 노동자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한다. 장기요양환자는 이제 다 나은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들의 의심은 노동자 개인을 넘어 제도를 향한다. 산재보험이 너무 많은 급여를 주고 있는지 의심한다. 고작 4.2%에만 적용된 추정의 원칙이 근거가 부족하다고 의심한다. 그 결과 ‘감사’라는 행정조치를 근거로 산재보험 제도를 공격하고 결국 선을 넘어 버린다. 산재보험은 행정의 권한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보험이라는 원칙을 무너트린다. 산재보험을 감사한다면 본래의 취지인 ‘산재노동자들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보상’에 맞게 운영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특정감사는 그 선을 한참 넘어 추정의 원칙, 요양 기간 연장기준, 소음성난청의 보상기준 등 사회적 합의에 기반해 만들어 온 기준들까지 훼손하려 들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지만 오히려 정치의 본질인 ‘사회적 합의’는 갈수록 실종돼 가는 수상한 시절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행정과 검찰이 수시로 월권을 행사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요즘이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사회적 파국과 피해자들의 고통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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