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일터, 내가 살아 온 날을 기록해 보자. 전문작가의 글처럼 수려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삶이 꼭 성공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노동자들과 퇴직예정자들에게 글쓰기,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편집자>
 

▲ 백승권 작가(<보고서의 법칙> 저자)
▲ 백승권 작가(<보고서의 법칙> 저자)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시가 쓰고 싶어졌다. 해질녘 풍경을 그린 시 한 편이 통째로 머리에 떠올랐다. 허겁지겁 종이를 찾았다. 쓰다만 일기장 뒤편을 펴고 단숨에, 일필휘지로 시 한 편을 썼다. 그날 이후 매일처럼 시를 썼다. 어느 날은 두세 편을 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시를 쓴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청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뒤에도 시 쓰기는 계속됐다. 달라진 점은 누군가에게 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벽(壁)’이란 이름을 가진 문학회에 들어갔다. 고교 2학년 때 ‘문학병’이 찾아왔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작품을 읽으며 작가적 삶을 살아야겠다는 조급증을 견디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기 위해 2학년 학기말 시험을 혼자서 ‘보이콧’했고 결국 3학년 5월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그 후 열 달 정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부산으로 내려가 신문팔이를 했고 전남 신안군 흑산도 어느 중국집 배달부, 강원 태백시 장성의 음료수 도매상 잡부, 경기 오산시 초콜릿 공장 직원, 대구시 신문팔이 등을 전전했다. 중간중간 출가를 하기 위해 절에 며칠씩 머물기도 했지만 머리를 깎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정신·육체적으로 피폐한 상태가 돼 이듬해 3월 시골집에 돌아왔다.

어머니의 권유로 시골집 가까운 곳 밤나무 농원이 있는 산에서 산지기 생활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가라앉혔다. 혼자 나무를 하고 불을 때 밥을 해 먹고 책을 보고 글을 썼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화톳불처럼 다시 살아났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이 그 불꽃을 잿더미로 덮어 버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글을 버리다

그해 5월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하고 뒤늦게 상경해 입시 공부를 했다. 중간중간 마음을 잡지 못해 떠돌기도 했지만 11월 학력고사를 치른 뒤 대학에 입학했다. 생각보다 입시 결과가 좋았다. 대학 등록금을 온전히 낼 수 있는 집안 형편이 아니라 4년 동안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선택했다.

대학 입학 후 신입생 대상 백일장이 열렸다. 신경림 시인이 심사위원이었다. ‘강’이란 시를 써서 장원에 당선됐다. 대학생 대상 문학상 공모에 시를 투고해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다. 문인 선배들이 문예지나 신춘문예 데뷔를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덕담으로 건넸다. 내 삶은 영락없이 시인으로 귀착되는 것 같았다.

86년 2학년이 됐다. 시 쓰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뱅뱅 돌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휴학한 뒤 단기사병으로 입대했다.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을 겪으며 거리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부천 어느 야학에서 중학교 국어 과정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를 했다. 공장 노동자와 다른 야학교사들을 만나면서 고교 이후 존재론적 고민에만 빠졌던 내 모습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운동권 학습 모임에 들어가 <세계철학사> 따위의 책을 읽고 밤새 열띠게 토론했다.

2학년 2학기에 복학했지만 이미 마음은 학교를 떠나 노동 현장에 가 있었다. 잠시 학교에 머물렀다 구로공단 어느 공장에 선반공으로 취업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기 위해 문학을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노동자’가 돼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시간이 날 때에도 글을 쓰지 않았고 책을 읽지 않았다. 어쩌다 꿈속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게 되면 ‘한심한 먹물’이라며 자책하고 부끄러워했다. 구로공단 생활 1년 만에 위장취업 사실이 들통나 구속돼 짧은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문학 글쓰기에서 실용 글쓰기로

복학했지만 학교에는 마음이 없었다. ‘남서울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라는 노동청년단체에서 간사로 일하며 구로공단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밥벌이를 책임져 할 위치가 됐다. 선배의 소개로 <언론노보> 입사 시험을 쳤다. 오로지 논술과 면접만으로 신입 기자를 뽑는다는 말에 용기를 냈고 가까스로 합격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버렸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대책 없는 젊은이의 생계를 열어 주는 수단이 됐다.

<언론노보>는 이듬해 <미디어오늘>이라는 미디어 전문지로 전환됐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일주일에 평균 100매 가까운 기사를 써야 했다. 외부 매체 기고도 활발하게 해 매주 200매 가까운 원고를 쓰는 생활이 계속됐다. 문학이 끼어들 틈이 하나도 없는 바쁜 나날이었다. 맹렬하게 취재하고 신랄하게 글을 썼다. 언론계·재계·정계 인사 등 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류들을 만나며 구로공단의 삶이 얼마나 ‘협소한 시야’에 갇힌 것인지 깨닫게 됐다.

결혼을 하고 30대 중반에 이르러 내 삶은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기자 생활 몇 년 만에 언론계에 대한 염증, 서울살이에 대한 환멸, 문학에 대한 미련이 이 안정을 흔들어댔다. 이런 복합적인 고민을 하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 덜컥 고향 충북 괴산으로 귀농을 했다. 자급자족할 정도의 농사를 지으며 문학에 다시 매진해야겠다는 당찬 꿈을 꿨다. 느타리버섯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조금 지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시 ‘먹고사니즘’이었다. 서울살이가 관계에 매인 삶이었다면 시골살이는 노동에 매인 삶이었다.

희한하게 시골살이의 한계가 꼭짓점에 이를 무렵 다시 글쓰기가 나를 구원해 줬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행정관 제의를 받은 것이다. 소정의 절차를 거쳐 홍보수석실 행정관으로 임명돼 대통령 메시지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매일 아침 8시에 열리는 관저회의를 시작으로 각종 회의에 참석해 대통령의 발언을 취재하고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를 썼다. 청와대 행정관 3년 동안 기자 시절 못지않게 많은 글을 썼다. 거기에 더해 내각의 장·차관,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이 쓴 글을 리라이팅 하는 업무도 맡았다.

노 대통령에게 더 배우지 못한 것 후회

노 대통령을 모시고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노 대통령은 ‘정치는 곧 말과 글’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했다. 노 대통령의 말은 에두르지 않고 곧장 본질을 향해 달려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어떤 메시지를 구상할 때엔 사물과 상황의 일면만 보지 않고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고 늘 가치와 현실의 균형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비유와 익살, 카피적 표현을 즐겨 쓰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폭포 같은 진정성이 있다. 대통령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점을 더 배우고 체화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내 글쓰기는 나의 소망과 달리 문학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신문 기자, 청와대 행정관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게 됐다. 문학 글쓰기에서 시작해 실용 글쓰기로 전환한 셈이다. 문학 글쓰기가 내 자아의 존재론적 고민을 파고들어 내면으로 깊게 깊게 침잠하는 것이었다면, 실용 글쓰기는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향해 넓게 넓게 확장되는 그 무엇이었다. 돌이켜보면 두 글쓰기 세계를 경험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실용 글쓰기를 해 보니 문학 글쓰기가 더 잘 보였다. 문학 글쓰기 경험이 있다 보니 실용 글쓰기가 더 깊게 보였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글쓰기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 간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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