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이주여성은 젠더·이주·인종·출신지역·고용형태·가족형태 등 다양한 이유로 차별받고 있다. 우리 사회에 비교적 빠르게 정착 가능한 결혼이주여성에게도 차별은 낯설지 않다.

원주민에게만 적용하는 호봉제, 승진의 제한, 국적 비하 같은 것이 그렇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결혼이주여성 4명이 정주여성에게 편지를 썼다. 기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유리천장을 함께 견디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집자>

미쉘(가명, 이주 19년 차)
미쉘(가명ㆍ이주 19년 차)

저는 서울과 닮은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제 출신국가의 수도이자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였어요. 아빠는 못 말리는 딸바보였습니다. 남자친구들한테 전화가 오면 통화를 오래 못 하게 하거나 저녁에는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어요. 엄마는 숙제를 도와주시는 다정한 분이셨어요. 저는 두 사람의 귀한 딸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한국의 부모들 못지않게 우리 부모님도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어요. 국제화 시대에는 외국어를 기본으로 알아야 한다며 저를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시키셨어요. 저 역시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대학에 가선 한국어를 전공했죠. 열심히 배워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운 좋게 장학금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공부를 더 할 수 있었어요. 한국 유학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한국 기업에 취직하게 됐어요.

회사 일은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직장 분위기가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자기계발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 꽤 행복한 직장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친구가 한국 남자를 소개해 줬어요. 공부와 직장생활로 주변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었던 저는 그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장거리 연애를 하다 결혼을 결심했어요.

결혼은 곧 한국으로의 이주를 의미했습니다. 친구들은 저에게 “한국에서 용의 꼬리로 사는 것보다 여기서 뱀의 머리로 사는 게 낫지 않냐”며 말리기도 했죠. 괜찮은 직장과 그동안 내가 쌓아 온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일해 왔던 것들을 한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두려움도 컸지만 한국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컸어요.

한국으로 이주한 뒤엔 정부기관이나 기업에서 통역가로 일했습니다.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은 많았지만 그 속에서 나름 경쟁력이 있었어요. 걱정과 달리 일도 다니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선물과도 같은 예쁜 아이를 낳았어요. 타향에서 출산을 하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잖아요. 다행히도 저는 고향에서 엄마와 가족들이 와 줘서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어요. 갓난 아기 육아는 정말 힘들더군요. 쪽잠을 자면서 두 시간마다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아기를 챙기느라 저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그때 시어머니께서 정성껏 만들어 주신 미역국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으로 눈물이 나요.

저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참 고마워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를 한국보다 후진국에서 왔다고 무시하거나 가르치려고 들지 않으셨어요. 분명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한국 문화에 익숙치 않아 실수도 하고 부족한 점도 많았을 텐데도 나를 같은 사람으로 받아 주고 기다려 주고 믿어 줬어요. 아무 편견 없이 나를 여자로, 딸로, 가족으로 존중과 예의를 갖추고 대해 줍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지만 여성에게 결혼생활은 행운이 따라 줘야 하잖아요. 특히 한국에서 사는 이주여성에겐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는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이번엔 저처럼 이주 온 사람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기관에서 통역과 번역을 해 주는 일이었어요. 늘 하던 일이었기에 자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일을 하니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들떴어요. 워킹맘들은 제 기분 아실 거예요.

결혼 전 제가 한국에 좋은 이미지였던 이유는 여행과 유학 시기에 봤던 발달된 도시의 모습, 깨끗한 자연환경과 편의시설, 그리고 그 시절에 만났던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어요. 물론 여전히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이 더 많지만, 일을 하면서 상처받는 경험들도 하게 됐어요.

한번은 기관에서 동화책을 나눠 주는 행사를 했어요. 한 직원이 “책을 많이 갖고 와서 다문화가족 아이들에게 나눠 주자”고 말했는데 다른 직원이 “다문화가족 아이들은 책을 안 읽잖아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찌됐든 다문화가족 아이들에게 동화책도 나눠주면서 행사는 무사히 끝났었지만, 저는 ‘이주민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전문가가 그런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고 씁쓸했어요. 다문화가족 아이들이 언어발달이 늦다는 연구가 있지만, 그건 아이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양육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라 우리 같은 기관이 언어코치 등 지원을 해 주고 있어요.

또 한번은 지역 신문에 인구소멸 문제의 해결책으로 ‘외국 며느리 모셔오기’와 같은 기사가 실렸어요. 이주여성이 들어오면 몇 년 안에 인구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이었어요. 기가 찼습니다. 저는 ‘이주여성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을 동물적 번식 수단으로 생각하는 비하 발언을 사과하라’고 반박글을 썼습니다. 제 글을 보고 다른 이주여성들도 같은 취지의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이주민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지역의 여성단체에서 아무 말이나 행동이 없어서 참 안타까웠어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지는 못해도 개인적으로는 공감해 주시겠지’라는 기대를 했지만 아니였어요.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기관에서 내가 계속 일해야 하나 고민도 했어요.

한국에 온 지 19년, 한국에서 일한 지 9년이 됐네요. 나름 한국말도 유창하고 일상생활에도 적응했지만 여전히 한국 문화, 특히 직장문화는 어려워요. 고향에서는 사장과 직원, 직장 선후배와의 관계가 비교적 편했습니다. 그래서 대개 해야 할 일을 다 하면 퇴근시간에 맞춰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한국 직장은 직원이 할 일을 다 마쳐도 상사의 눈치를 보더군요. 저는 당연히 처음부터 정시 퇴근을 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새로 들어온 신입직원이 눈치도 없이 상사와 선배들보다 먼저 퇴근을 해서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저는 지금도 정시퇴근을 하는데 이런 보이지 않는 규칙이 많아서 힘든 거 같아요. 지금 나의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이 일하는 곳도 이런 문화가 있나요?

내가 좋아서 선택한 나라, 한국에서 저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에게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어 노동조합에도 가입하고 집회도 나갑니다. 편견을 버리고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며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겸손해질 때, 우리는 진정한 다문화 사회를 아름답게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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