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촉촉하고 파릇한 녹지에서 싱그러운 분위기로 얘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바닥이 쫙쫙 갈라진 메마른 저수지 바닥 위에 앉은 느낌이 드는 곳에 대한 얘기를 하면 힘겹다. 차라리 이야기 속에 깊이 들어가 웃으며 하는 것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한 지역의 노조간부인 A에게 노조의 회계공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노조회계 공시를 노동탄압이라고 하는 논리는 두 가지 같아요. 하나는 반윤석열이고 다른 하나는 노조의 자주성이죠. 정부를 반노동적이라고 생각할 만해요. 실제 노동자를 위해 좋은 일 하는 것이 안 보이니까. 그런데 회계공시를 수용하는 이유가 조합원이 몇 푼도 안 되는 세액공제 안 되는 걸 못 참아서라면, 조합원의 좁쌀 같은 실리주의를 이기지 못해 노조 자주성을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기업은 사적인 집단인데 왜 회계공시를 할까요. 그렇다면 노조는 사적인 조직인가요, 사회적 책임을 가진 조직인가요. 노조가 공적 집단이라면 회계공시는 무조건 거부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좁쌀과 바꾼 자주성

긴 얘기로 이어질 A의 답변이 시작됐다. “회계공시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거부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왜 니들 맘대로 세액공제 못 받게 해?’라는 조합원들 반발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쩔 수 받아들인다고 결정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참여한 논의에서는 그랬는데 세액공제를 수용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조합원이 몇 푼도 안 되는 세액공제 못 참아서 수용하는 것으로 논의가 됐다는 거죠. 그러니 현실적으로 적어도 실제 벌어진 논의 과정에서는 조합원의 지극히 좁쌀 같은 실리주의를 이기지 못해 노조의 자주성을 버린 것이 돼 버린 겁니다.”

“글쿤여. 햐 참 평소에 공공성을 그렇게 외치면서.” “심지어 모 노조에서는 만약 본사(노조간부들은 총연합 중앙을 종종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 글에서는 대화 취지를 살려 조직 공식 명칭 대신 이렇게 표기한다)에서 회계공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면 노조 재정을 사용해서 조합원에게 세액공제 손해분을 지급해 주자는 논의를 했답니다.” “ㅎㅎㅎㅎㅎ” “결국 본사에서 거부 안 해줘서 매우 고마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ㅋㅋㅋㅋ”

“회계공시는 무조건 거부해야 하거나 혹은 무조건 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또 공적인 집단이냐 사적인 집단이냐가 절대적인 판단 기준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무조건인 일이 얼마나 될까요. 유행가에서나 무조건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를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는 예산의 상당 부분을 영수증도 없이 처리하고,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대통령과 장관들에게 영수증 필요 없는 돈을 가장 많이 할당해 주죠. 국회에도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국방부나 국정원 같은 곳은 더하고. 물론 회계공시가 그만큼 타이트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것을 어떤 이유로 공개하라고 요구하는가 또는 사회적으로 합의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당신을 향한 나의 무적권

“애초에 회계공시 압력 들어왔을 때 되치기 하는 방법도 생각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가 공개할 테니 (어용)시민단체를 비롯해 공공성과 사회성이라는 관점에서 상응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논의하자는 식으로. 근데 본사가 좀 그런 거 같아요. 윤석열이 하는 것은 반대. 무적권!” (여기서 무적권은 어떤 적도 물리칠 권법이 아니라 온라인 대화나 문자에서 무조건이라는 단어를 비틀어서 쓰는 표현법이다)

“그런 의견도 강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극히 일부지만 있긴 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 쟁점이 더 있는데 ‘세액공제’라는 조세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기도 한 것 같아요. 조세를 통한 재분배와 적절한 세수 확보를 제대로 못하면서 특정 계층과 특정 이유에 따라 공제해 주는 방식의 제도 설계가 적절하냐? 그런 면에서 조합비에 대해서도 세액공제를 적용하는 게 맞는 거냐?” “뭐 그것도…”

“저는 윤석열이 하는 걸 제대로 반대라도 했으면 좋겠네요. 집회할 때만 반대하고, 실제로 현장이나 일상에서는 반대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러게요.” “그러니 본사 사장님은 전략도 없고 조직적 공감대도 못 만들면서 자꾸 간부들 중심으로만 주말마다 불러서 아주 미쳐버 리겠어요. ‘확대간부 집중’ 이런 거 붙여서 주말마다 불러내요. 아우 짜증나 정말.” (지역조직 간부인 B나 산별노조 본사 간부인 C·D 등도 이런 하소연을 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반대는 무~적권 무적권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반대는 말만 투쟁이야~” “헐, 웃긴데 정말 너무 끔찍하게 슬프네요.” “평일에 일 많아서 저녁 있는 삶도 어려운데, 주말도 없는 삶이라니. 집회를 조금 줄이더라도 거기에 들일 정성 절반만이라도 들여서 조합원에게 이야기할 내용을 만들고 실제로 만나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집회에 끌려다니느라 그런 거 할 시간이 없어요.” “정말 이게 말도 못 하게 짜증나요.” “그럼 끌려가지 마셔요. 뚝.” (본사 지침에 끌려 나가는 A, 아예 안 나올 것으로 알려진 스타일 B, 잘 나가는 편인 C, 눈치껏 빠지거나 참여하는 D는 각각 스타일이 다르다)

주말 본사 부름

“우리 지역 이사님이 그런 데 끌려나가 주지 않는 걸 너무 싫어하셔서. 본사 지침에 따른 집회 참석에 매우 민감하심.” “빈곤해서 그것만이 운동적 실천으로 남았나요.” “그분에게는 아마도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작년에는 총파업 선언만 해놓고 사실은 연속집회만 연달아 하던 때에 지역 시민과 함께 뭔가를 좀 해 보겠다고 연일 늦게까지 일하는데,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 한마디 없다가 본사 지침 집회 안 나온 걸로 조지시더라고요.” “아이고…”

“뭐 뒷담화라 더 이상 말씀 안 드리겠고 아무튼 사정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사가 더 이상 광장정치나 거리투쟁만 얘기하지 말고, 광장이나 거리에서 하는 얘길 현장이나 골목에서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르크스 글 중에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노동자는 공장 문밖에 머리를 두고 출근한다고 했던가? 비하가 아니라 노동자가 극복할 과제를 얘기한 것이죠. 수많은 노조간부들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니, 공공성이니, 노조의 자주성이니 하는 ‘원칙’을 공장 문밖에 두고 출근하는 건 아닌지.”

“어떻게 노조의 사회성을 높일 것인가. 제게도 중요한 화두죠. 그리고 광장보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벌어지는 마디활동을 고민 중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준비를 좀 하고 있긴 한데 제대로 가는 방향인지,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나서 수다를 좀 떨어 주시지요.” “넵.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으허허허허. 이번 주말도 틀렸어요. 우리 사장님 부름에 응해야 해서, 그래도 나름 즐겁게 지내 보겠어요. 주말 잘 보내요.” “퐈~이~~팅”

갑자기 한국의 사회적 지능이 낮아졌다고 판단할 지표는 없다. 그런데 정치를 보든 사회운동을 보든 사회적 지능이 떨어진 것 같다. 일치단결 총력동원체제의 시절이 있었지만, 다양한 산업의 다양한 조건을 가진 거대 집단이 되면 다원적 운영 방식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옛날식 총동원을 고집하다 화석이 돼 가는 무적권을 마주한다. 새싹은 파릇하고 청춘은 푸르지만 성년 지난 집단의 역동성이 약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다른 곳에서 찾으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오르지만, 그곳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애틋한 노력을 봤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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