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사용사업주(원청)가 파견관계를 부정해 파견노동자와 ‘동종·유사 업무’를 수행하는 원청 노동자가 없을 경우 법원이 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명시적인 근로조건’이 없었던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조항에 따라 대법원이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12일 고속국도 톨게이트 통행료 수납 업무를 수행한 한국도로공사 외주업체 소속 노동자 A씨 등 596명이 도로공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소송을 제기한 지 무려 9년4개월 만이다. 같은 쟁점으로 심리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3건도 이날 함께 선고됐다.

외주업체 수납원들은 이미 2019년 8월 대법원에서 대부분 근로자 지위가 인정돼 공사를 상대로 기준임금과 복리후생비에 준하는 금액을 지급하라며 2014년 11월 소송을 냈다. 수납원들은 경비원·청소원·식당조리원 등 조무원에게 적용된 ‘현장직 직원 관리 예규’를 기준으로 임금을 청구했다. 공사측은 근로자 파견관계 자체를 부인하며 맞섰다.

이에 ‘동종·유사 업무 노동자’가 없을 경우 어떤 기준을 적용할지가 쟁점이 됐다. 파견법 6조의2 3항은 ‘사용사업주가 파견근로자를 직접 고용하는 경우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가 없다면 파견근로자의 기존 근로조건의 수준보다 낮아져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하급심은 예규를 적용해 임금을 산정해야 한다며 수납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1·2심에서는 각각 313억원과 215억원의 청구금액이 인정됐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사용사업주가 파견관계를 부인하는 등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가 자치적으로 근로조건을 형성하지 못한 경우 법원이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구체적으로 통행료 수납원을 직접고용할 경우 ‘조무원’에 준하는 근로조건을 적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법원은 “피고 현장직군의 하위 직종 중 하나인 조무원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근로자로서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반복적인 잡무를 처리하는 직종 전부를 지칭한다”며 “원고들과 같은 통행료 수납원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공사가 직접고용하지 않은 기간 동안 근로제공이 불분명하거나 근로 미제공에 공사 책임이 있는지는 수납원들이 증명해야 한다고 보고 이러한 부분이 증명되지 않은 기간까지 임금 청구를 인용한 원심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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