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

예산은 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예산은 법이 아니다. 예산법률주의를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국가에서 예산이 법이 아닌 나라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예산편성권이 의회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인 미국도 예산편성권은 국회에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국회 본연의 임무가 입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산이 법이면 의회가 수립하고 의결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우리나라는 예산이 법이 아니다 보니 국회에 편성권이 없고 의결권만 부여하고 있다. 매우 이상한 혹은 특별한 시스템을 가진 셈이다.

헌법개정 논의 때마다 예산법률주의는 논쟁거리이다. 그전까지는 어디까지가 위법인지, 지켜야 하는지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산편성권이 의회에 있더라도 집행하는 과정에서 시행령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데, 하물며 편성권까지 없으니 우리나라 국회의 예산심의 기능은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다.

예산낭비나 예산의 임의적 집행, 다른 곳에 쓰는 예산전용이나 사용하지 않는 이월 등에 대해서 언론이나 의회가 지적하지만 처벌이나 영향이 없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예산이 법이 아니라 행정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행정 중심의 ‘강정부 약의회’ 국가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심의·의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산의 심의·확정권을 국회에 부여하고 있는 헌법 제54조의 취지를 살려 예산 관련한 법률 규정은 존중돼야 할 필요가 있다.

예산안 심의·의결 이외에도 국회는 특정 사업의 집행과 관련된 의지를 표명하는 별도의 수단으로써 부대의견을 활용하고 있다. 집행 과정에 대해서도 의견을 첨부함으로써 의회의 심의 취지를 살리려고 하고 있다. 물론 아직 기획재정부의 예산독점에 대한 견제 기능으로써는 미약하다.

예산 관련 법도 지키지 않는다

예산 자체는 법이 아니지만 예산 관련한 법들은 많이 있다. 역시나 이 법을 지키지 않아도 처벌은 없다. 행정지침의 성격이 되고 있다.

이번에 나라살림연구소는 재난관리기금을 살펴봤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라 조성해 운용하고 있는 재난관리기금은 매년 지자체의 3년간 보통세의 100분의 1을 적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들은 법에 따라 일반회계에서 의무적으로 예산의 일정액을 재난관리기금에 전출해야 한다.

그러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매년 본예산 편성시 과소 편성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243개 지방자치단체의 재난관리기금 전입액 점검을 통해 재난관리기금 조성의 실태를 파악해 봤더니 광주광역시, 강원특별자치도, 울산광역시 등 3개의 광역지자체와 경기 고양시, 경기 안양시, 경기 안산시 등 6개 시와 강원 홍천군, 강원 철원군, 강원 양양군 3개의 군, 부산 연제구, 인천 중구 2개의 자치구 등 모두 14개의 지자체가 부족하게 편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문제가 있을까.

첫째, 예산 관련 법을 위반한다는 문제다. 법으로 재난관리기금을 규정한 것은 재난관리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그런데 지자체 다수는 재난에 대한 의지도, 예산 관련 법의 준수에 대한 의지도 부족했다.

둘째,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사업에 활용되는 재원이 부족할 경우 재난안전관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다. 갑자기 재난이 발생하면 예비비로 대처할 수도 있지만 안정된 재원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재난관리기금은 예방의 기능도 있기 때문에 평상시 재난에 대한 예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셋째, 재난관리체계 평가에서 감점을 받거나 특별재난지역 선포시 재난특별교부세 교부에서 불이익을 받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나마 정부가 강제하는 방식이 적립인데, 지방자치단체는 위기의식 없이 대처하고 있다. 중앙정부도 강력한 의지 없이 지적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재난관리평가에서 반영하는 것도 불이익이 적어 효과를 찾기 어렵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관료주의적 행정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산 관련 법을 어겨도 된다는 생각, 이를 감독할 정부의 의지부족, 불이익을 받아도 책임지지 않는 행정의 문제 등이 주는 태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문제가 발생해도 총체적인 문제이니 아무도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 관료주의의 특성이다.

무력해지는 예비타당성조사제도

또 하나의 보고서가 있다. 예비타당성제도와 관련한 보고서다. 예비타당성조사제도는 한국만이 있는 정말 의미 있는 제도다. 원래 사업을 편성할 때 타당성을 검토하는 보고서를 만든다. 그런데 개별부서에서 자신의 사업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맡겼더니 예외 없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자신들이 하려는 사업이니 당연히 꿰어맞춘 보고서를 작성하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예비타당성 제도다. 별도의 기관에서 독립적인 예비조사를 시행하는 제도이다. 사업비 500억원이 넘고, 정부 재정투입이 300억원이 넘을때 시행한다. 처음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만이 시행하다가 지금은 조세재정연구원, 지방행정연구원 등 여러 기관이 수행한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진 이 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시행된다. 그 덕분에 토건 등 방만한 재정운영을 억제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그리고 이 제도는 수많은 전문가와 관료들이 계속 발전시켜 온 제도다. 이 제도는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경제성 중심만도 아니다. 과학기술이나 지역균형 등도 충분히 고려하는 제도다. 논란은 여전히 많지만 나라의 재정을 지켜온 중요한 법적 도구이고 절차다.

그런데 이 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변형돼 왔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재해재난 등의 명목으로 면제사업을 늘리더니, 문재인 정부에서는 지역균형 등의 이유로 면제사업을 늘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인과 관료들은 예타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역설적으로 예타가 중요하고 신뢰받는 절차라는 얘기다.

연구소는 최근 5년간 예비타당성조사제도에 관한 보고서를 살펴봤다. 놀랍게도 5년간 97개 사업, 80조원의 사업에서 통과율 90%를 기록했다. 제도 초기에는 통과율이 50% 수준이었다. 이제는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는지 의심스럽다. 지역이 불리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경제성이 1보다 낮아도 통과된 사업이 43개다. 그중에는 사회 복지 사업도 8개나 있다.

문제는 아예 예타를 받지 않는 면제사업이 163건에 106조원이나 된다는 점이다. 이러면 예타에서 통과되지 않는 희귀한 사업들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통과되지 않은 사업 중에는 나중에 이름을 바꿔 통과된 것들도 있다.

내로남불 재정건전성

재정건전성은 숫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재정의 규율을 세우고 지켜야 한다. 예산이 법은 아닐지라도 이미 법으로 만들어 지켜야 하는 재정규율만큼은 지켜야 한다. 정치적 논리라는 핑계로 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부는 조세지출 비율도 지키지 않고, 예타도 향해화시켜버렸다. 쓰고 싶지 않을 때만 들이대는 재정건전성과 규율은 내로남불이다. 있는 법부터라도 지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하면서 약속한 예산 및 투자유치 공약이 831조원이다. 이것도 2월16일 12차까지 계산한 것이다. 총선 선거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하고 있다.

이러는 동안 지난 2년간 국채발행은 133조원이 늘었다. 반면 지난해만 56조원의 세수감소가 있었다. 재정규율이 무너진 자리에 빚더미만 남게 될 것인가. 국가부채는 미래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자로 부담을 주는 현재 고통이다. 이러면서 돈이 부족해 연구개발(R&D) 예산도 줄이게 된 것이다. 미래 투자를 포기해 미래도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내로남불은 로맨스 이야기이지만 재정파탄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나라살림연구소장 (jcs619@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