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새벽 5시15분. 휴대전화 알람소리에 하루가 시작된다. 씻고, 말리고, 입고. 몸에 새겨진 루틴에 떠밀리듯 출근준비를 하고, 노트북과 자료들로 터져나갈 것 같은 백팩을 둘러맨다. 얼굴에 비비크림 하나 못 바른 상태로 까딱하면 놓쳐버렸을 버스에 몸을 싣고는, 휴~. 먹고살기 힘들구먼. 흔들리는 좌석에 기대어 앉아 비로소 생각에 잠긴다. 이번엔 무슨 주제로 글을 써볼까? 3·8 세계여성의 날에 어울리는 내용이면 좋겠는데. 그리하여 <무사안일> 일곱 번째 사연은 20년째 월급쟁이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성노동자 이야기로 준비했다. 주인공은 바로 나, 79년생 구은회다.

어쩌다 그날 미용실에 갔을까

스무 살 이후로 나는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취직을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상용직 노동자가 되기 전까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벼룩시장 구인공고를 보고 보습학원 강사, 김밥집 서빙, 뷔페식당 설거지, 지하철역 앞 유인물 배포, PC방 파트타임 같은 일들을 구했다.

어느 날은 동네에 새로 오픈한 백화점으로 주차안내 아르바이트를 갔다. 인력업체에 연락처를 등록해 뒀더니 일하러 나오라고 전화가 왔다. 내가 맡은 구역에 서서 두 팔로 차량의 진행방향을 안내하면서 입으로는 “감사합니다. 고객님”을 외치는 일이었다. 나는 그날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첫째, 하루종일 서서 일하면 많이 힘들다. 둘째, 인력업체는 수수료를 많이 떼 간다. 훗날 나는 ‘유통업체 의자 놓기 캠페인’이나 ‘불법파견 중간착취’에 대한 글을 쓸 때면 그날의 교훈을 떠올리곤 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아직 IMF의 여파가 남아있던 때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도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딱히 불행하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사실을 그때도 알고 있었던 걸까.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어느 작은 잡지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표를 포함해 전 직원이 다섯 명뿐인 손바닥만 한 회사였다. 그럼 어떤가. 나도 이제 직장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잡지사 대표는 친절했다. 사회 초년생인 나를 앉혀놓고 직장인의 애티튜드(attitude)에 대해 일러주곤 했다. 다 나 잘되라고 하는 얘기였다.

“취재 다닐 때는 단정한 인상을 주는 게 좋겠지? TV 봐봐. 아나운서들이 단발머리인 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 미용실 가서 머리 좀 자르자. 내 말 알겠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대표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며 나는 그날로 머리를 잘랐다. 그렇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어리바리 결정체였던 것이다.

‘좋은 데’ 가자던 그때 그 진상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은 찾아온다. 그걸 알아채는 사람과 못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 뿐. 여느 때처럼 퇴근길 지옥철 안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데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일노동뉴스>였다. 두어 달 전 공채시험에 응시했다가 필기에서 떨어진 회사. 나에게 추가 면접의 기회를 주겠노라 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첫 출근의 기억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 정진학원 6층 가건물. 장막 같은 종이 냄새, 담배 냄새를 걷어 내고 비닐장판 깔린 좁은 복도를 따라 다섯 발짝 걸어 오른쪽 방. 나는 출근 첫날부터 “이렇게 쓸 거면 쓰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며 찌그러졌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인간으로 형상화하면 그게 바로 나였다.

<매일노동뉴스>에 필자가 입사한 2004년 찍은 단체사진. 벌써 20년 전이다. <자료사진 매일노동뉴스>
<매일노동뉴스>에 필자가 입사한 2004년 찍은 단체사진. 벌써 20년 전이다. <자료사진 매일노동뉴스>

수습기자라도 하루에 기사 한두 꼭지는 써야 했는데, 나는 어디서 취재 거리를 찾아야 할지 몰랐다. 무턱대고 출입처 행사란 행사는 죄다 따라다녔다. 행사가 끝나면 뒤풀이 자리까지 쫓아갔다.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주겠지. 가끔은 오물통에 발이 빠지는 날도 있었다. 은근슬쩍 어깨나 허리춤에 손을 대든, 블루스 추자고 엉겨 붙던, 좋은 데 가자고 수작을 부리던 그렇고 그런 진상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점점 사나워졌다.

제 몸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30대의 나는 갈수록 사나워졌을 뿐만 아니라 노련해졌다. 기사 거리를 분별해내는 눈이 생겼고, 좋은 소스를 제공해주는 취재원들이 있었다. 일이 재미있었다. 그날 치의 기사를 마감하고 나면 하이에나처럼 술자리를 찾아다녔다. 중요한 얘기는 술자리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휴대폰에 녹음기능이 없던 때라, 테이블 밑에 수첩을 쥐고 있다가 받아 적거나 화장실에서 복기했다. 만날 녹초가 돼 택시에 실려 귀가했다.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다.

당연히 몸은 엉망이 돼갔다. 그즈음 나는 신우신염·간염·난소내막증 등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미련하게도 낭종 절제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해서도 기사를 썼다. 나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시간을 쪼개 야간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진짜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바쁜 와중에 공부까지 하는 내 모습을 훈장처럼 전시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졸업은 했지만 공허함만 커졌다. 당시 나는 언론노조 매일노동뉴스지부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림살이 빤한 회사에서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무기력 속에 부유하듯 지내다가 휴직계를 냈다. 휴직기간이 끝나갈 때쯤 사표를 냈다. 후회는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표4>.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고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뒤 나는 세 번 더 회사를 옮겼다. 인생의 나침반은 가끔 고장이 났나 싶다가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정확한 방향을 가리켰다. 보다시피 40대의 나는 여전히 글을 쓰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파괴적인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지 않는다. 글의 소재를 갈구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 직업건강 문제는 너무나 다양하고, 누군가는 알아듣기 쉬운 말과 글로 그것들을 통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일환경건강센터에는 여성이 많다. 사업장을 방문해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살피거나, 유해하고 위험한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필드의 전문가들이다. 출산과 육아의 터널을 건너오는 중에도 산업보건 전문가로서 커리어를 쌓아 올리는 단단한 여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은 그들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발버둥만 쳤던 아둔한 청춘 말이다. 나의 좋은 선생님이자, 아무것도 아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선한 그녀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기를.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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