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진보진영 안에서 노동시장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조직노동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헐거운 논리만 반복하며 정작 현장의 구체적 반론에 묵묵부답인 경우도 본다. 정말 변화를 꿈꾸기보다 ‘진보의 금기’에 도전한다며 조직노동에 대한 공격으로 지지세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 아쉽다.

어떤 문제든 기원과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법률도, 시민 의식도, 노동운동도 단번에 역사를 뛰어넘을 수 없다. 87년 이후 노조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의식도 성장하고 근로조건도 좋아졌지만 우리 사회가 ‘조직’보다 ‘개인’으로 노동자를 끊임없이 원자화했던 시간은 길었다. 노동법 개정 역사를 봐도 그렇다.

1960년대부터 87년 민주화 전까지 중대한 노동법 개정은 세 번 있었다. 모두 쿠데타나 유신을 선언한 직후였다. 정당성이 약한 정부는 경제성장을 우선적 가치로 보고 노동자의 집단적 요구와 결사를 억압하기 위해 노동법을 바꿨다. 그렇다고 단순히 사용자 요구에 수용적인 것도 아니었다. 기업들은 53년에 만들어진 노동법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며 개정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군사정부는 노동자 개인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바꿔 나갔다. 집단적 노사관계는 억압하는 대신 국가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확장해 근로감독을 강화하는 형태로 노동의 요구와 불만을 일정 부문 수용하고자 했다. 물론 노동자가 사용자와 집단적·조직적으로 대등한 교섭이 불가능했기에 노동조건 개선에 한계가 있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노조의 일차적 요구는 ‘조직하고 교섭할 권리’였다. 쉽지 않았다. 반면 노동자 개인의 근로조건이나 보호 법제는 노동의 힘이 커질수록 빠르게 좋아졌다. 가령 89년에 노태우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집단적 노동관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노동시간 단축 등 개별노동관계법 개정안은 그대로 수용했다. 이후에도 보수 정부는 선거 때면 기업 틀 내 노동자를 보호하고 법률과 규제에 의한 노동조건 향상에 어느 정도 동의해 왔다. 그러나 노조를 만들고 교섭할 권리가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데에는 사용자와 정부의 저항도 훨씬 거셌고 전반적인 시민 인식도 더디게 변화했다. 지금도 노동시간 단축 같은 의제는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되지만, 노조가입 범위를 확대하거나 교섭 범위를 넓히려는 논의에는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시민 인식은 그간 우리 사회가 노동을 다뤄 온 오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대대적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 노조는 노동시장의 전면적 자유화를 막아 내려 했다. 그런데 기업 단위와 일부 정규직에 머무는 이유는 노동운동의 역량 부족도 있지만 ‘집단’과 ‘조직’을 끊임없이 거세해 온 구조가 작동한 결과값에 가깝다. 즉 지금 노동운동이 가지는 한계는 수십 년에 걸쳐 한국 사회가 ‘노동’을 다뤄 온 구조가 맞물리는 문제이지, 주체의 타락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몰역사적이다.

문제의 구조적·역사적 차원을 삭제하면 조직노동을 비롯한 주체를 지나치게 타자화하기 쉽다. 그런데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며 소득·노동조건의 격차를 경험하는 것은 제조업 노동자만이 아니라, 상당수 직업 세계에 만연하다. 가령 명문사립대 정교수와 그렇지 않은 대학의 계약교수 및 시간강사 간 격차는 제조업 원·하청 노동자 간 차별과 비교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대학만 아니다. 공공기관이나 지자체, 언론이나 연구기관은 물론 국회나 정당부터 사회단체에 이르기까지 과거 없었던 인턴이나 계약직이 넘쳐나고 직무 자체를 외주화한 경우도 많다. ‘너희도 같지 않냐’고 힐난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이 속한 공간에서 이해관계를 다룰 때와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지나친 대상화를 벗어나야 분석도 대안도 빈약해지지 않는다. 문제를 깊게 다뤄야 몇몇 ‘제도’만 도입하면 세상이 바꿀 것 같은 ‘과도한 제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구체성 없는 단어만 남발하며 화제성에 집중할수록 본래 꿈꾸던 변화는 희미해진다. 노동을 자본에 복속시키고자 배제하는 이들과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조직하고 결사된 이들이 공동체를 위한 노력에 더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다만 노동운동을 과도하게 폄하하거나 현장 없는 ‘선거 승리만의 정치공학’이 ‘노동정치’인 것처럼 호도하는 이들에 지지 말자. 노력하는 이들이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의 이상을 위해 뚜벅뚜벅 나아가 주시면 좋겠다.

부족한 사람에게 지면을 허락해 주신 <매일노동뉴스>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과분한 관심과 격려를 받아 삶의 기쁨과 용기가 됐다. 이젠 더 긴 호흡으로 공부할 시기 같다. 현장에서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노동자, 수많은 활동가의 노고를 잊지 않는 겸허한 연구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단 약속을 감히 드려 본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haeyoonj@naf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