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명칭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로 정했다. ‘경제사회위원회’로 의견이 모아지던 중에 민주노총이 ‘사회노동위원회’를 제안하면서 논의가 꼬였다. 결국 2차 노사정대표자회의(2018년 4월3일)에서 결론이 났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민주노총이 제안한 사회노동위원회라는 1안과 2안(경제사회위원회)을 조율해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하면 민주노총은 양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동으로 좁혀 버린 명칭

사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라는 이름은 개발시대의 이미지는 물론 경제·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동을 동원한다는 전체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노사정위원회가 쌓아 온 ‘정부정책의 들러리’라는 오명을 걷어내기 위해서도 명칭변경은 불가피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라는 이름이 노동의 중심성이나 대표성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옛 이름이 노·사·정이라는 주체를 앞세웠다면 새 이름은 경제·사회·노동이라는 의제를 앞세웠다.

개인적으로 ‘경제사회위원회’로 가지 못한 아쉬움은 적지 않다. 경제사회위원회라는 명칭은 노동이 경제와 사회의 하위부문(sub-system)이지만 핵심부문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노사가 경제·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명칭에 노동이란 단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 대화의 범위가 노동 중심으로 축소됐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외국에서도 사회적 대화기구는 경제사회위원회라는 이름을 많이 쓴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국제조직도 ‘국제경제사회위원회협의회’(AICESIS)다. 지금 당장 무슨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노동이란 단어가 사족이라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영어 명칭도 Tripartite Commission for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Economic, Social and Labor Council(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꿨다. 기존의 Commission을 Council로 대체한 것이다. Commission이 갖는 관료적이고 경직적인 느낌 대신 Council이 주는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개방적인 느낌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을 봐도 Council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노동존중 사회 지향, 의제 범위·참여 주체 확대

명칭만이 아니라 그 명칭이 지향하는 바도 바뀌었다. 설치목적에서는 “산업평화를 도모하고” 대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도모하며”를 삽입했다. ‘산업평화’는 강제된 노사협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낡은 시대의 유물이었다. 사회적 대화는 갈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건설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사회적 대화의 목적을 사회 양극화의 해소와 사회통합의 도모로 바꾼 것은 사회적 대화가 지향하는 노동존중 사회의 상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존중 사회의 의미와 그 실현전략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건 아니다(이 역시 사회적 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노동존중 사회가 사회 양극화의 해소와 사회통합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 양극화 해소는 사회적 대화의 성격을 포용적 코포라티즘(inclusive corporatism)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대화는 1960~70년대의 네오 코포라티즘(사회적 코포라티즘)과 1980년 이래의 신자유주의 코포라티즘(경쟁적 코포라티즘)을 넘어 새로운 코포라티즘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노동조합의 양보나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넘어 취약노동자의 포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미완의 시도로 그쳤지만 최소한 출발은 그랬다.

사회적 대화의 의제도 확장했다. “고용노동 정책 및 이와 관련된 산업·경제·복지 및 사회 정책 등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기로 했다. 이는 노사정위원회 시절의 “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등에 관한 노동정책 및 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산업·경제 및 사회 정책에 관한 사항”을 대체한 것이다. 복지정책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등에 관한”이라는 문구는 삭제했다.

설립목적의 변화와 의제 확장은 참여 주체의 확대로 이어졌다. 노동존중 사회 구축이라는 일관된 흐름의 일환이었다. 여기에는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 그리고 공익위원이 포함된다. 먼저 근로자위원은 양대 노총 대표 외에도 여성·청년·비정규직 대표를 더해 5명으로 늘렸다. 사용자위원에는 경총과 상의 외에 중소기업·중견기업·소상공인 대표를 추가했다. 계층위원을 뒷받침하기 위해 계층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양대 노총은 계층위원에 대한 의결권 차등화를 요구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의결권 차등화란 정부와 노사 조직대표 사이에서는 합의를 추진하되, 계층위원과 공익위원이 포함된 본위원회는 협의기구로 이원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자체가 취약계층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인식될 수 있었다. 계층위원이 반발하고 나설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계층위원제 도입, 공익위원 늘렸지만

계층위원제 도입은 대표성을 확장함으로써 사회적 대화의 사회적 권위를 높이고 제도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간 들리지 않았던 계층의 목소리를 듣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사회적 대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직노동의 중심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노동은 계층위원 추천권을 가지며 합의제로 운영되는 운영위원회와 의제개발조정위원회에도 참가한다. 의제별·업종별위원회의 위원 추천권은 물론 공익위원 후보에 대해 의견을 진술할 권한도 갖는다.

계층위원제 도입 필요성에 관한 논의는 오래됐지만 도입 방안은 백지상태였다. 선임대상이나 규모·절차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시행착오는 불가피했다. 조직노동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노동측 계층위원이 양대 노총 소속이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래서 여성·청년·비정규직 대표는 양대 노총 소속이 아닌 사람으로 위촉했다. 하지만 경사노위가 2019년 9월, 재구성되면서 한국노총이 비정규직과 여성 계층위원을 자신의 조합원으로 추천하면서 이 합의는 깨진다.

계층대표의 수가 조직대표의 수보다 많아 과다대표의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노동측 계층위원은 조직의 대표가 아닌 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대표성과 책임성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사용자측 계층위원은 해당 조직의 대표들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2019년 3월 ‘탄력근로제 사태’를 맞으면서 한꺼번에 불거지고 만다.

한편 공익위원의 수는 2명에서 4명으로 늘렸다. 그간 위촉방식으로 활용되던 순차배제는 폐지했다. 경총의 강한 주장이 아니더라도 순차배제 방식은 공익위원 후보 개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대신 “전국적 규모의 총연합단체인 노동단체와 전국적 규모의 사용자 단체의 의견을 들어 위원장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위촉한다”라는 조항을 도입했다. 공익위원의 수를 늘린 것은 공익위원이 노사갈등을 적극 조정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익위원은 노사관계 전문가도 아닌 데다 의제별·업종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갈등을 조정한다는 건 비빌 언덕도 없이 싸움터에 나서라는 격이었다. 애초에 민주노총과 경총은 공익위원을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협의기구에서 공익위원이 필요한가”라는 건 아직도 남아 있는 의문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사회적 대화=협의’라는 성격 규정을 살펴본다. 노사정 주체로서는 어렵잖게 합의했지만 사회적 합의에 대한 기대가 큰 상황에서 논란이 불가피한 지점이었다. 사회적 대화가 합의가 아닌 협의에 그쳐도 좋은 걸까, 실제로 그렇게 운영되기는 했을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