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정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얼마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망한 커밍아웃’ 경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연은 누나의 성적 지향을 알게 된 남동생의 이야기였다.

남동생이 우연히 누나의 성적 지향을 짐작하게 됐고,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밝혀야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은 누나는 얼떨결에 커밍아웃을 하게 됐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라고 담백하게 말한 누나는 남동생이 퀴어 차별적인 말을 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다. 남동생의 첫 번째 답은 이랬다. “누나도 상의 탈의하고 시위 나가는 그런 페미야?” 몹시 당황하며 넘겼는데, 다음에 오는 말들이 더 가관이었다. “누나도 남성 혐오 같은 거 해?” “애 안 낳는 사람들한테는 비출산세를 걷어야 해” 우리는 누나가 여자를 좋아하든 말든 과격한(?) 페미니스트인지, 남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닌지에만 관심 있는 남동생을 두고 “고도로 발달한 성차별주의자는 앨라이(ally, 성소수자 당사자는 아니지만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와 다를 바 없다”라며 깔깔 웃었다.

이 대화 하나로 우리 사회에 산재한 여러 차별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 성차별에 도전하는 여성은 위험하고 문제적이라는 인식, ‘남성 혐오’가 실재한다는 착각, 혼인과 혈연을 바탕으로 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여자’를 획득하고 ‘가족’이라는 집단을 만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남성 간 배타적 연대, 성애적 대상이 동성인 여성은 남성 집단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납작한 논리 점프 등. 특히 나를 웃기고도 슬프게 만든 지점은, 앞에 앉은 여성의 성적 지향은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성소수자 정체성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에 가려 또다시 숨겨지는구나 싶어 슬퍼해야 할지, 혐오는 종류에 따라 경중이 달라지는 것인지 여러 생각이 스쳤다.

지난해 퀴어노동권포럼에서는 ‘직장내 커밍아웃의 조건 찾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현재 일터에서 커밍아웃했는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64.1%가 누구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런 조건이라면 커밍아웃 하겠다’라는 질문에는, 직 내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동료가 있을 때(62.8%), 직장의 분위기가 소수자 친화적일 때(54.9%), 동성 배우자와의 결혼식·신혼여행에 대한 축의금과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을 때(33.2%)라는 답변이 가장 많이 선택됐다.

결국 커밍아웃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어떤 소수자성에도 친화적인 문화라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은 단층의 정체성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용기 내 커밍아웃 했지만, 다른 종류의 소수자성으로 차별받는다면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을까. 레즈비언이면서 페미니스트인 ‘나’가 여성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점을 비난받느라 퀴어인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반대로 이성애 규범에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비난받느라 페미니스트인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커밍아웃은커녕 반복적으로 ‘나’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갇히고 만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넘고 넘어야 할 허들이 계속된다면 커밍아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될 것이다.

망한 커밍아웃 이야기 속 남동생이 누나가 과격한 페미니즘에 젖어 남자를 싫어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퀴어인 누나의 삶과 경험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결혼과 가족 구성에 관한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하기를 바란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나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삶, 내가 가지지 못한 생각에 대해 가까운 사람에게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건, 그걸 토대로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우리는 이렇게나 다르지만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음을 당연하고도 소중하게 여긴다면 내가 어떤 ‘나’로 존재하는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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