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일터, 내가 살아 온 날을 기록해 보자. 전문작가의 글처럼 수려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삶이 꼭 성공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노동자들과 퇴직예정자들에게 글쓰기,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편집자>
 

▲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제목을 보고 내용의 대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책을 만든 편집자의 역량을 평가할 일이겠다. 이 책, 청소 일을 하는 한 노동자의 일기 모음이다. 책 표지에 ‘어느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 필자 마이아 에켈뢰브는 스웨덴의 청소노동자다. 1918년생. 그녀가 40대 후반부터 50살 즈음에 들어서는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간간이 이어진 일기를 모아 놓았다.

글을 쓸 당시 마이아는 아들 넷, 딸 하나 둔 이혼녀였다. 자녀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거나,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 청년들이다. 아들이 취업이 안 되거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날도 많다.

그는 청소 일을 하지만 그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다만 힘들어한다. 낮은 임금, 고된 노동, 사회적 저평가는 글의 곳곳에 아쉬움으로 적혀 있다. 청소업무가 자동화하는 것도 두려운 관심거리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스웨덴의 열악한 계층 노동자로서 느끼는 아쉬움 한편으로, 60년대 말 세계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견해를 수시로 만날 수 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폭격에 분노하고,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여러 나라를 향해 퍼붓는 공격에 안타까워한다. 미국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해방운동, 프랑스 등 유럽을 휩쓴 68혁명에서 청년들의 움직임에 대한 연민과 지지가 절실하다. 당시 환경문제에 대한 견해를 만날 수 있고,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인 푸에블로호 사건도 등장한다.

이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국내외 정치·사회 문제 전반에 관심이 많고 뉴스를 열심히 듣는다. 청소부로 일하며 우편 수업 등을 통해 문학과 사회·수학 등을 꾸준히 공부했다. 노동단체 모임에 열심히 참여한다. 그렇게 견문을 넓히고 자기 견해를 펼쳐 나간다. 책을 읽는 게 자부심의 원천이다. 크고 작은 잡지, 신문, 라디오에서 열어 준 독자투고, 시청 소감 공모에 참여하고 작은 글이 소개되는 걸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이 한걸음 한걸음이었고, 마침내 <어느 청소부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한 노동문학 공모전에 응모해 당선됐다. 이 책이다. ‘일하며 쓴다’는 점에서, 솔직한 노동문학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지금도 스웨덴 문학사의 한 장으로 그의 일기가 꼽힌다. 지금 그가 살았던 도시 칼스쿠가에 그녀 이름의 광장이 조성돼 있다.

일하며 글 쓰자, 새로운 세계가 온다

이 책을 소개하는 건 신데렐라 얘기와 다르지 않을 ‘문학적 성취’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그것이 한 삶을 어떻게 빛내는지를 돌아보자는 뜻이다. 글쓴이 마이아의 필력은 대단하지 않다. 글마다 무엇인가 매번 부족하고, 많은 내용들이 생략되고 제대로 묘사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추어 필자의 ‘그저 그런’ 일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다 읽고 나면 청소노동자 마이아의 생활 속 애환, 성실한 삶의 태도, 읽고 쓰며 발돋움하는 삶을 느낄 수 있다.

돌아보면 누군들 그런 글을 쓰지 못하랴. ‘일하며 글을 쓰자!’ 그것이 글 쓰는 이를 자부심 넘치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 것이다. SNS에 쓰고, 일기장에 쓰고, 컴퓨터에 쓰자. 내가 하는 일, 내가 속한,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기록해 보자. 이 책이 주는 깨달음이다.

퇴직 앞둔 당신, 내 삶을 써라

특히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에게 글쓰기를 권한다.

지금 퇴직을 앞둔 이들은 우리 사회가 크게 변화한 한 시대, 한복판을 함께 흘러온 세대다. 가난을 털어 내며 일어서던 나라의 역동성 안에 차별과 권위주의와 서열문화가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또 변화를 향한 용틀임이 거듭됐다. 고도성장의 수혜자들이었고 역군이었다. 사회의 민주화를 체험하며 노조를 시작한 것도 이들 세대다. 고속 승진, 노동조건 개선의 신화를 이뤄 온 것도 이들이다. 변화가 클수록 억울한 일도 아쉬웠던 경험도 굽이굽이에 새겨져 있다.

집단의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말로 풀면 장광설로 이어지기 십상인 경험들이다. 자칫 잘못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은 얘깃거리들. 그런데도 여전히 ‘나 때는 말이야!’가 이어지는 건 그 변화의 폭이 넓고, 각 사람에게 너무도 깊이 강렬하게 체험된 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얘깃거리를 글로 쓰면 달라진다. 정돈된 얘기가 되고 한 개인, 한 조직, 한 세대의 이야기가 된다. 글이 갖는 특성이기도 할 것인데, ‘생각한 이야기’ 글은 글쓴이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그의 삶을 갈무리할 수 있도록 이끈다. 조직과 사회에는 그런 기록들이 자산이 된다. 변화를 객관화해서 살필 수 있게 하고, 때로는 변화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기록이 갖는 힘이다.

청춘의 날을 쏟아부은 일터의 경험, 이 속에서 겪은 체험, 변화를 곱씹어보라. 그 변화가 얼마나 컸던가. 그 성취, 또는 어느 실패가 내게 남긴 건 무엇인지 돌아보라.

이제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다. 인구구조가 보여주는 사회현상의 하나다. 팔팔한 50~60대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에 나서는가에 따라 각 개인의 이후 삶, 우리 사회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여러 퇴직자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모색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 프로그램의 하나로 일터의 삶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사회의 유명인들이, 성공한 이들이 자서전을 쓰듯, 일터에서 좌절하고 성장해 온 기록들,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가족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얘기들까지 기록하고 정리해 보자. 삶의 한 무대를 갈무리하는 일이 될 것이고, 새로운 무대로 나서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것이 꼭 성공담일 필요는 전혀 없다. 삶은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장엄하지 않나.

분명히 자기 위안이 될 것이다. 스웨덴의 청소노동자 마이어 에켈뢰브가 방송에 소개되는 자신의 글을 자랑스러워하듯이 내 이름으로 내놓은 작은 책 한 권은 스스로에게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주된 직장을 떠나게 될 퇴직 예정자에게 꼭 필요한, 자기 위로와 자부심을 북돋우는 프로그램,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디딤돌 놓기. 내 삶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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