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여보세요.”

휴대전화에서 다부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상보다 젊은 목소리였다. 재활기록 속 이름과 생년월일을 빠르게 스캔했다. 나보다 겨우 한 살 위네. 어색한 침묵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고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일환경건강센터입니다. 예전에 작업용 차량 개조 지원했던….”

일면식도 없는 마흔 중반의 두 사람은 그렇게 10분 남짓 대화를 주고받았다. ‘무사안일’ 여섯 번째 사연은 산재로 한쪽 다리를 잃고도 강인한 의지로 원직복귀에 성공했던 한 노동자가 겪은 두 번의 좌절에 관한 이야기다.

청소차노동자에게 닥친 첫 번째 비극

2020년 10월의 어느 새벽. 20년 가까이 재활용품 수거 차량을 운전해 온 이경수(가명)씨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다. 트럭에서 내려 적재함에 짐을 싣던 중 돌진해 온 승용차에 부딪혔다. 운전만 해도 되는데 동료의 작업을 돕다가 벌어진 일이다. 한순간의 사고로 그는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아직 젊었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거주지인 강원도 원주를 떠나 산재의료기관인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에서 집중 치료와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반드시 직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경수씨를 지켜보며 담당 의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돈이다.

사고를 당하기 전 그는 수동변속기 차량으로 폐기물을 수거했다. 그런데 왼발 클러치 조작이 필수인 수동차량을 왼쪽 다리가 절단된 상태로 운전하기는 어려웠다. 공단 직업복귀지원팀이 차량 개조 비용을 알아보니 자동변속기 개조에 자그마치 2천만원이 필요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공단 직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수동차량에 전자브레이크를 장착하는 ‘세미 오토’ 방식을 찾아냈다. 클러치를 밟지 않아도 되고, 개조 비용은 대당 200만원을 넘지 않았다. 에이~ 몇천만원도 아니고, 공단이 산재노동자 직장복귀 지원하는데 이 정도 돈도 못 내겠어? 이런 데 쓰려고 산재보험료 꼬박꼬박 걷어간 거 아니야?

산재노동자용 차량 개조를 위한 협업

일환경건강센터와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이 산재노동자 원직복귀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일환경건강센터>
일환경건강센터와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이 산재노동자 원직복귀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일환경건강센터>

안타깝게도 근로복지공단이 경수씨를 도울 방법은 없다. 업무용 차량 개조를 지원할 수 있는 규정이나 재원이 없어서다. 차량 개조를 포함한 작업환경 개선은 공단의 업무 범위를 벗어난다. 보상과 예방이 단절된 산재행정시스템 때문이다.

산재보상·재활 업무는 근로복지공단으로 산재예방 업무는 안전보건공단으로 분리돼 있다 보니, 두 영역이 서로 연계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형국이다. 경수씨가 치료와 재활훈련을 받는 것까지는 산재보상·재활 영역에 포함되지만, 차량 개조는 산재예방 영역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안전보건공단이 경수씨를 도우면 해결될 일 아닌가? 방법이 없진 않다. 경수씨네 회사 사장님이 안전보건공단에 ‘클린사업장 조성지원 사업’을 신청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요건과 절차가 까다롭고, 보조금 지급까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세미오토 차량용 전자브레이크는 우선지원 품목도 아니다. 신청한들 지원 대상에 뽑힌다는 보장이 없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은 ‘산재요양을 위한 휴업기간과 그 후 30일 동안’은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산재노동자를 천덕꾸러기 취급하거나 암묵적으로 퇴사를 종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사장님, 클린사업장 신청해 주세요”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보상과 예방이 단절된 상태에서 설계된 현행 제도는 산재노동자의 업무복귀를 촉진하는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당장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현실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일환경건강센터가 나설 차례다. 센터의 존립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 건강증진을 둘러싼 ‘제도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경수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센터는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간과 공공의 전문가들이 산재노동자 원직복귀를 위해 손을 잡은 것이다. 협약에 따라 센터가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3.5톤 트럭 두 대와 5톤 트럭 한 대를 고치는 데 총 506만원이 들었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50명 미만 중소기업 유해·위험시설 개선을 위해 책정한 예산은 총 957억원. 1만1천732개 사업장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니 업체당 815만원 꼴이다. 돈이 없어서 문제다? 아니다. 필요한 곳에 쓰이지 못하니까 문제다.

‘보상과 예방’의 단절, 비효율의 극치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재활치료실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재활치료실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담당 의사로부터 차량 개조 지원이 가능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경수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었을까. 그는 2021년 10월 마침내 회사로 돌아갔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산재노동자가 원직장 또는 타 직장으로 복귀한 비율(직업복귀율)은 69.2%. 그런데 산재노동자가 원직장 내 원래 일하던 업무로 복귀한 비율(원직복귀율)은 45.5%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의 원직복귀율이 70%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산재노동자에게 원직복귀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심리적 안정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익숙한 동료들과 일하면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경제활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보상과 예방의 단절이 산재노동자의 원직복귀를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라면 바로잡아야 한다. 경수씨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안전보건공단 클린사업장 사업의 우선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 일종의 패스트트랙이다.

필요한 곳에 적절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성을 깨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전국 산재병원의 직장복귀 지원 프로그램, 전국 근로자건강센터의 중소기업 안전보건 컨설팅,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의 직업병 역학조사 등이 산재예방 사업과 연계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보상과 예방을 연계해 산재노동자 원직복귀율을 높인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 산재보험과 유사한 독일의 재해보험조합은 산재예방과 치료·재활·보상·감독을 총괄한다. 뿌리 깊은 노사협력의 전통은 산재문제를 대하는 독일사회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재해보험조합은 노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재활보다 예방’이라는 원칙 아래 예방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예방을 통한 보상비용 절감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덤이다.

고용의 외주화가 부른 두 번째 비극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재활치료실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재활치료실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최근에 회사를 그만 두셨다고요? 복직해서 잘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전 지방자치단체가 청소업체를 변경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수씨의 동료들은 여러 업체로 흩어지게 됐다. 고용의 외주화가 그려낸 쓸쓸한 풍경이다.

“해고는 아닌데 회사랑 얘기해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면서 일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눈치도 보이고…. 그동안 조금 지친 것 같아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명시적인 해고는 아니더라도, 익숙함으로부터 결별해야 하는 그에게 퇴사만이 유일한 선택지였음을.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허리디스크가 도져 입원치료를 받았다는 그는 다시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는 중이다. 구직급여를 신청하고 워크넷에 들어가 구인광고를 살펴보는 일이 주요 일과가 됐다.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어디 나 같은 사람 받아주는 회사가 없네요.”

얼굴도 모르는 경수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비슷한 나이, 젊고 다부진 그의 음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좌절을 딛고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고용불안이 표준이 된 시대, 산재노동자의 일상 회복을 위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다.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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