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헤경 노동법 박사
▲ 유헤경 노동법 박사

과거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 정권이 외세의 힘에 의존해 대통령이 되거나(이승만의 경우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힘에 의존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집권함으로써(박정희는 5·16 쿠데타에 의해, 전두환은 12·12 쿠데타에 의해 집권) 권력형성의 정통성이 직접 문제가 됐다.

김영삼 정권은 3당 합당으로 창출돼 개혁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외세에 힘입어 정권을 창출했던 것도 아니고 군부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것도 아닌 만큼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점에서 권력형성의 정통성은 인정받을 만했다. 그러나 권력행사의 정당성 측면에서 볼 때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정 작업은 1996년 12월26일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노동자와 국민의 커다란 저항을 받아 1997년 3월13일 법으로 제정됐다. 1996~1997년 법개정의 내용은 첫째, 근로기준법의 개정인데, 주요 개정내용은 정리해고 요건의 완화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비롯한 근로시간의 유연화다. 둘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주요 개정내용은 사업장 단위에서의 복수노조 허용하되 시행 유예, 노조전임자에 대한 급여지급 금지하고 노조전임자에 대한 급여지급을 부당노동행위의 하나인 경비원조로 파악하는 내용, 무노동 무임금 원칙의 확립이다.(1996년 법 규정에서는 쟁의행위시 임금지급 금지를 규정했다가 1997년 법 규정에서는 임금지급 의무가 없음을 규정함)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은 1987년의 민주화 이행과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권위주의적 노동체제가 해체, 권위주의적 노동체제를 재편하는 것으로 이뤄져, 자본의 논리에 부응한 ‘유연한 노사관계’를 위한 정책적 모색이 이뤄졌고 세 가지를 주요한 특징으로 했다.

첫째, 물리적 억압에 주로 의존했던 6공화국과 달리 민간의 자율교섭과 사회적 합의의 형식을 추구했고 둘째,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노사관계를 구분하고 양자에 대한 차별적 전략을 추구해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협조적인 방향으로 제도화하고 개별적 노사관계에서는 자본측의 요구를 수용, 정리해고제의 완화와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반영했다. 셋째는 집단적 노사관계에서의 협조와 합리화에 대한 모색과 개별적 노사관계에서의 유연화를 통합해서 권위주의적 노동체제를 해체하고 합의의 형식을 통한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은 권위주의적 노동정책의 완전한 해체보다는 권위주의적 노동체제의 연장이라고 말할 만큼 제한적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은 주요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로부터 확인된다. 1995년 한국통신 사건에서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통신시장 개방 반대, 대기업 위주의 통신산업 민영화 중지 등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해결하기 힘든 경영사항에 대해 요구하자 경영사항이 의무적 교섭사항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불법파업으로 판단,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의 농성에 대해 전격적으로 경찰병력을 투입해 노조간부들을 연행, 구속했다.

이 사건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통신 노조가 불법행위를 계속해 정보통신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 노사문제를 ‘국가전복 기도’로 판단해 과거의 권위주의적 노동체제에서 노사문제를 안보적 차원으로 대응했던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투쟁의 성격을 볼 때 특징적인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차원의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개별 자본가를 상대로 해 이뤄지는 경제투쟁과 다른 정치투쟁을 목적으로 해 자유권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했다. 노동법 개악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은 첫째,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으로서 의의가 있고 둘째, 노동법 개악에 반대한 것으로서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가 아닌 정치적 요구를 목적한 투쟁이었으며 셋째, 개별 사용자에 대응해 투쟁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서 정치투쟁이었다.

우리나라 초기 노동운동은 일제시대의 반일 민족해방투쟁으로 전개해, 미군정 시기 자주독립국가를 실현하려는 요구 투쟁으로 결집돼 자유권을 지향했고 이승만 정권 시대 노동운동도 자유권을 내포한다. 이승만이 제3자로 쟁의에 개입해 쟁의를 종결하는 등 국가권력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노동운동이 중앙정보부의 상시적 개입과 탄압 아래 억압돼 경제적 요구로 일어난 투쟁도 국가권력의 탄압에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됐고(YH무역 노동자 투쟁이 대표적) 1980년대는 신군부정권의 살인적 폭력 아래서 노동운동은 “국가에 대한 대규모 전면 공격”이라 할 만큼 투쟁의 성격이 개별 사용자에 대한 대항에서 나아가 국가권력에 대항한 성격을 보여줬다. 더 나아가 김영삼 정권 시대의 주요 노동운동도 ‘노동법 개악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국가권력에 대항한 정치투쟁으로 전개돼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사실 측면에서 자유권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측면에서 ‘자유권’을 지향한다는 것이 노동운동이 노동자 생존에 관련된 이해와 요구를 기반으로 전개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생존에 관련된 이해와 요구가 폭발돼 이뤄지기 때문에 생존권에 대한 이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당한 노동자 생존 요구가 그것을 일상적으로 탄압하는 살인적 폭력적 정권에서는 국가권력과 대립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고 투쟁의 무게중심이 개별 사용자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대립하는 것으로 변질된다. 때문에 단순한 생존투쟁에서 보다 폭넓은 자유의 지향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일제시대의 노동운동도 노동자 생존 요구를 무참하게 탄압하고 억압하는 일제 식민통치에서는 반제 민족해방투쟁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만큼 일제시대 노동운동은 정치투쟁으로서 자유권을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이 자유권을 본질로 하느냐 아니면 생존권을 본질로 하느냐의 문제는 노동운동이 노동자 생존 요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영역을 넘어 자유의 영역으로 투쟁의 무게 중심이 확대·발전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단순한 사실과 역사적 사실의 구별

그런데 김영삼 정권 시대의 다른 노동운동 사례(부당노동행위에 대항한 투쟁이거나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의 임금인상 투쟁 등)가 자유권으로서 투쟁의 본질을 제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과 단순한 사실의 문제가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해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데서 역사는 시작되고,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사실 사이의 구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절성과 중요성이 밝혀지면 단순한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서 승인될 수 있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 측면에서 이뤄지는 선택의 과정으로서,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 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며 그 밖의 다른 인과적 전후관계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배제돼야만 한다.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으로서 총파업 투쟁은 김영삼 정권 시대의 대표적인 노동운동으로 다른 사실(부당노동행위에 대응한 투쟁이나 임금인상 투쟁)들과 구분되는 의미있는 중요한 것으로써 단순한 사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투쟁은 역사적 사실로써 평가되어 가치와 결합된다.

각 시대의 주요 노동운동 속에서 그 시기 노동운동이 자유권을 지향했는가, 생존권을 지향했는가의 문제도 이렇게 단순한 사실과 역사적 사실(의미있고 중요한 사실)의 구분해 이해해야 하고 역사적 사실은 가치와 결합해 의미있는 하나의 체계가 된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정권 시기의 ‘노동법 개악 반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은 단순한 사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승인해야 하고, 그 역사적 사실 속에서 자유권의 지향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자유권이라는 가치체계와 결합된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