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2020년 12월부터 4년에 걸쳐 연재한 ‘아무나 유니온’ 칼럼이 새로운 이야기로 독자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건준 아유 대표가 인터뷰한 노조 밖 아무나씨 100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전 자아가 왜소한 것 같아요”. B의 얘기다. 시청률 따라 성취도 절망도 빠른 방송작가의 마음 근육은 어떨까. 비교하고 평가받는 마음에 자존감 차오르기 쉽지 않다. 물론 이야기를 쓰고 출연자를 섭외하는 등 변수를 극복하면서 쌓인 내공도 있을 것이다. 자아가 비대한지 왜소한지를 비롯해 안정형, 무시형, 집착형, 혼란형 등 애착유형이 자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B가 “저는 혼합형인가 봐요” 하자 “넌 자아 부자야”라는 C의 말에 빵 터졌다. 이런저런 면을 가졌으니 자아 부자라는 긍정의 힘이 웃음을 터지게 했다.

프리랜서는 다양한 사람과 협업한다. 이런 경험이 노조의 역량으로 전환될까. D는 생계를 위한 경험이라 노조에 의미 없다지만 생존을 위해 일하다가 쌓이는 것이 역량이다. B는 몰랐던 동료 이메일을 수집하고, 메일을 발송하고, 사연을 얘기하는 자리를 만들어 노조로 이어지게 했다. 본인은 이를 자각할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 발굴을 통해 적절한 주체화 방식을 개발할 수 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왜 노조를 했냐고 묻자 B가 답했다. 빼앗고 뺏기고, 누르고 눌리는 관계에서 인간적 성숙은 어렵다. 노조를 통해 존중받고 존중하는 관계로 성숙해 나갈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익보다 성숙 열망으로 노조를 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흔히 사용자에 대한 분노와 이익추구가 조합원을 모으는 동력인 것으로 보이지만,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가 아니란 걸 겪어보면 안다.

“너무 바빠서 만날 수가 없어요”. 왜 조합원은 서로 만나지 못하냐고 묻자 A가 말했다. A만큼 왕성하게 일하고 바쁜 사람도 많지 않을 텐데, 그는 노조에 적극적이었다. 바쁘게만 살다 보면 상상력이나 의미도 먹고사니즘에 붙잡힌다. 그러나 인간은 뭔가에 의미가 꽂히면 그것에 모든 것을 건다. A만 그랬다면 조합원은 없었을 것이다.

“아예 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방송에 따라 일하는 패턴이 달라서 만날 시간을 잡기 힘들어요”. 라디오 쪽인 B는 티브이 쪽보다 루틴이 안정적이라고 했다. 기성노조의 조합원 대부분은 같은 기업에 소속감을 가지고 모여서 일하기에 루틴이 같다. 이들은 동시에 모이는 조회나 교육 등 고정적 활동이 가능하다. 프리랜서들은 기업에 대한 소속감 없는 사회공장에서 분산돼 일한다. 에너지가 흩어지는 엔트로피 증가처럼 사회공장은 노동을 흩어지게 했다. 분산되어 다양한 루틴을 가진 이들은 유동적이다.

“우린 방송계 새터민이죠”. C가 말했다. 탈북하면 검증과 감시 또는 관리를 받는 것이 새터민이다. 방송계 프리랜서도 평판을 통해 검증받는다. “조합원들은 노조 가입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냐고 걱정해요. 가입 사실을 감추려 해요.” 바쁜 것보다 이것이 노조에 적극적 참여를 막는 장벽이란다. “지역은 좁은 동네죠. 지역에서 노조활동으로 찍히면 살아가기 힘들까 봐 주저해요” 불이익 공포는 노조할 권리를 차단한다. 너도나도 노조해야 공포가 사라진다. 그런데 새터민 같은 현실이 버티고 있다.

“한 번도 없어요”. 조합원은 1년에 몇 번 만나냐고 묻자 B와 C 모두 이렇게 답했다. 일상이 충만하지 않으면 공허를 어떻게 채울까. 이벤트다. 그것은 일상(日常)을 벗어난 사건이 벌어지는 비상(非常)이다. 일각에서 이벤트로서 투쟁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쁨 + 엇갈린 루틴 + 공포’라는 조건을 뛰어넘어 모이게 할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다. 노동자성이나 부당해고를 다투는 업계 사례들은 확장력이 있었을까. C는 확장력 약한 사례를 언급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직장을 바꾸기 위해 현장에 조직을 갖추고 사무실도 현장에 두는 것이 통상적 노조다. 사회공장(소셜팩토리)은 다르다. 분산돼 플랫폼에 접속해 생산하고 판매한다. 동료를 만날 기회가 적다. 노동 분산도가 높은 소셜팩토리의 노조는 온라인 커뮤니티처럼 운영해야 할까. 직장 밖에 있는 단체나 정당에서 손가혁(손가락혁명군)은 큰 역할을 해 팬덤정치가 탄생했다. 노조도 이렇게 해야 할까. 그런데 온라인 중심인 노조 사례를 보면 규모가 작고 교섭력도 낮다.

공장에서는 생산과정이 표준화되어 과정을 통제해야 정량 정품을 생산한다. 사용자는 현장 기초질서를 강조한다. 사회공장에서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편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에 통제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소프트웨어 개발, 각종 디지털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서는 결과 평가가 중요하다. 방송은 프로그램 방영 후 시청자 반응에 따라 프리랜서 계약이 해지되거나 연장된다.

과정 통제와 결과 평가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과정을 통제하는 공장에서 노조를 만들려면 통제를 뚫어야 한다. 곁의 동료들과 뭉쳐서 관리자의 감시와 압력에 대응하고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다. 현장투쟁이나 일상활동이 없으면 노조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힘들다. 일상 마디마디에 스며들지 못하면 노조는 일상 밖에 있다. 노조가 일체감보다는 이질적인 타자화된 집단이 된다. 나와 일상에 인소싱된 것이 아니라 아웃소싱 된다. 참여해 가꾸는 것이 아니라 간부에게 아웃소싱 된다. 조합원은 고객이 되어 간부들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안되면 클레임을 걸거나 탈퇴한다. 이러면 조합원 확대는 물론 간부 재생산도 어렵다.

“그래도 이번 집행부엔 갈등이 없는 편입니다”. C의 얘기다. 작은 규모의 노조에서 자원 부족 속에서 책임을 짊어진 간부들은 예민해지고 작은 차이가 갈등으로 변할 수 있다. 온라인에 의존하는 노조에서 보이는 사례다. 여기는 차기 집행부 구성을 둘러싼 어려움이 있는 시기다. 다행히 C가 중책을 맡겠다는 결심이 서서 고민이 덜어진 거 같다. “문제는 다음이에요. 그다음 집행부 할 사람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회공장에서 노동과정을 통제하지 않는 것은 굳이 과정에 신경 쓰지 않고 비용을 쏟지 않아도 통제 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을 통해 접속하는 노동을 관리한다. 직접 고용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혹은 계약직을 써 관리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절감한다. 결과가 나쁘면 계약을 해지하는 등 가혹한 평가를 통해 노동을 통제한다. 이런 분야에 여성이 많다.

가시적, 직접적, 물리적, 과정의 통제에 대응하는 것은 분명할 수 있다. 공장에서 탄생한 전통적 노조는 파업으로 컨베이어 벨트를 멈춘다. 노동자가 손을 떼면 생산이 멈추는 것을 통해 노동자가 가지지 못했던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 노동자 자존감이 최고에 이르는 순간이다. 사용자들이 파업을 경계하는 이유는 생산 차질로 인한 손해만이 아닌 노동자 마음에 새겨질 자존감 때문이다.

사회공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응 방법이 뚜렷하지 않아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면, 불의를 견딘다. 플랫폼 기업에서 노동자가 플랫폼을 멈출 수 있는가. 작가들이 방송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팬덤정치를 만든 손가혁처럼, 게임업계 반페미를 주도하는 남초 유저들처럼 온라인 공격방식이 필요할까. 조합원 결집과 이슈에 달려드는 응집력이 필요하다. 조합원들이 1년에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아웃소싱 된 노조가 할 수 있을까.

공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 대응은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복수’를 떠올렸다. 힘과 자원을 가진 남자의 복수는 우발적이고 거칠다. 힘이 약하고 자원이 부족한 여성은 치밀하게 준비해서 확실하게 끝내야 한다. 직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고정형, 직장이나 공장으로부터 독립된 유동형, 두 유형이 혼합된 복합형에 따른 더 치밀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인터뷰를 정리하다가 그분들께 해야 할 얘기가 생겼다. “당신들의 노조가 아직 규모가 작고 재정도 부족하고 영향력이 작은 것은 당신들 탓이 아닙니다. 과거에 노조가 탄생하고 활동했던 상황과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정규·비정규라는 구분을 지나 프리랜서가 늘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사회공장이 확산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권 확장과 노조의 대대적 성공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대면하는 상황입니다. 당신들 잘못이 아닙니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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