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법률사무소 고른 대표변호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온통 ‘민생’을 부르짖는 시간이다. 수많은 의제가 선거 이후로 밀려나지만, 늘 선거 전이거나 직전인 한국 정치에서 ‘민생’만은 언제나 상시적 의제다. 그런데 민생은 누구의 생인가. 정부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더라도 하루 최소 6~7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에서,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을 제 날짜에 시행한 것이 “민생을 외면”한 것이라니. 이런 정부와 여당의 반발을 보며 찾아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민생이 ‘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를 의미한다고 풀어쓰고 있다. 그렇다면 “민생을 위해 50명 미만 사업장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을 유예하라”고 목청껏 외치는 정치인, 사용자단체, 언론 등에게 노동자는, 특히 작은 사업장에서 보다 취약한 근로조건과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일반 국민’ 미만의 존재인가. 저들이 말하는 ‘민생’에 노동자의 생은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비록 헌법에 명문의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존본능과 존재목적에 바탕을 둔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헌법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로서 기능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헌재 1996. 11.28.자 95헌바1 결정). 헌법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해(34조6항) 국가의 재해예방 및 국민 보호의무를 정하고 있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은 5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에 대해 법률 적용을 아예 배제하고 50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에게는 이를 유예함으로써 중대산업재해의 위험으로부터 이들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거나 덜 하였다. 중대재해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더 많이 죽고 더 많이 재해를 입는 노동자를 더 두텁게 보호하기는커녕 법의 보호대상에서 배제해, 동일한 중대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사업장 규모에 따라 심각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다. 마침내 지난 1월 27일, 법 제정 후 3년이나 지나서야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가 중대재해처벌법의 보호대상에 포함되었는데, 이를 두고 재차 법을 유예하라며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더 심각한 점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유예로 작은 사업장 노동자 보호를 미루는 것의 대가로 여야가 논의했던 사안이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설립과 같은 일개 행정조직의 개편이라는 것이다. 물론 정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는데는 조직과 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할과 기능도 불분명하고 불충분한, 졸속적으로 등장한 조직 개편안이 그에 해당할 리 없다. 법의 보호대상인 노동자에게 불리한,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보호 축소를 논의하려면 적어도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른 보호 조치 강화를 고민하는 것이 타당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유예는 단순한 처벌 유예가 아니라 보호 유예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싼 정부·여당의 태도,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논의 수준은 ‘온전한’ 중대재해처벌법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이토록 사업주에게 온정적인, 심지어 법을 준수할 의지도 없고 수년의 준비기간을 줬음에도 안전보건 역량을 갖추는 노력조차 않는 기업에게 감정이입하는 이들의 손에 법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오히려 앞으로는 5명 미만 사업장을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와 보호에서 모두 배제하고 있는 잘못을 바로잡는 개정을 논의할 때다. 사업장 규모와 상관없이 의무가 있어야 노력도 한다. 사업주는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조치나 산업재해 발생을 인간의 존엄성 문제보다는 비용 증가의 문제로 인식하는 바, 의무위반에 대해서 형사처벌과 같은 엄격한 공적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재해의 발생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헌법재판소의 앞선 판단(헌재 2017. 10. 26.자 2017헌바166 결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일터를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오늘날 폐허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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