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자유기고가

예전에 ‘청년 보수’로 이름을 날리던 이와 ‘법치’를 주제로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 보수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법치’(法治)와 ‘준법’(遵法)을 구별하지 못했다. 법치는 군주의 자의적인 통치로서의 ‘인치’(人治)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견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반박에, 그는 국가가 아니라 ‘떼법’을 외치는 대중이 견제돼야 하기에 법치의 의미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던 그는 지금도 ‘노사법치주의’라는 해괴한 조어를 숭상하며 노조·시민단체의 불법 시위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법치와 준법을 혼동하는 관점에는 ‘정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민들의 개별적인 의지가 어떻게 여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입법부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보편적 의지’와 합치되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저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시위를 하는 게 불쾌하게 느껴지고, 어떻게든 그들을 제압할 명분이 필요해 법치를 들먹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건 제정된 법에 우리가 왜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정이다. 어떤 지점에서 개인의 의지와 입법부가 제정한 법에 담긴 의지 간의 ‘일치’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비판>에서 이 문제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전제로 성립하는 근대 사회의 본질적인 한계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국가로 대표되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분리돼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두 영역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괴리돼 있기에 시민사회의 의지와 정치사회의 의지 간 불일치가 나타나고, 그 불일치가 헌정질서의 정당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괴리’의 직접적인 해소 방법에는 한쪽의 의지를 다른 쪽에 강제하는 ‘폭력’이 있다. 마르크스가 근대 자본제 사회를 ‘부르주아 독재’라 비판하는 건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마르크스와 정반대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 칼 슈미트는 이 문제를 헌법에 최고 규범의 지위를 부여할 결정권자와 권위체인 ‘주권자’ 출현으로 설명한다. 자의적인 주권자의 결정이 헌정질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는 헌정질서가 주권자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 즉 폭력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의는 법과 폭력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걸 전제로 한다.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규율하는 규범이 반드시 법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다. 자의에 대비되는 규범들 중 일부가 법으로 제정된다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사회 내부에 다양한 규범들이 더 많이 존재하고 그러한 규범 중의 일부가 필요에 따라 입법부를 통해 공동체의 보편적 의지와 합치돼 법의 형태로 확장될 때 비로소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개인과 국가가 즉각적으로 일치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규범공동체들을 매개로 해 그 규범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편성이 창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의 역할이 있다.

사회 내에 다양한 규범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규범들에 의해 규율되는 다양한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이 내부의 구성원들을 규제할 강제력을 지니게 될 때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조직만이 그 내부를 규율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구성원들의 복종을 유도할 권위를 지니게 된다. 국가와 개인으로부터 독립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그에 기초해 구성원들을 규율하는 조직들이 더 많아질 때 비로소 그 사회를 ‘다원화된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자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숨가쁘게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조금만 달라져도 정당이든 시민단체든 어디든 조직을 비난하며 이탈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심지어 속해 있던 정당에 입에 담지도 못할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나가기까지 한다. 모두 조직이 복종을 요구할 권위를 지니지 못했기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렇게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정당들이 과연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킬 정치인들이 이해관계의 차이를 이유로 당에서 나가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다원화된 사회도, 통합된 사회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사회에는 오직 개인과 국가만이 서로 괴리된 채 존재할 것이다.

자유기고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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