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상사의 수백억 원대 횡령을 처리하며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린 노동자가 일으킨 뇌출혈은 업무상 재해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출퇴근 기록 시스템이 없어 근무시간이 적게 산정됐지만, 법원은 횡령 사건 처리로 인한 업무 폭증과 스트레스를 인정했다.

‘업무시간 기록’ 없다고 노동시간 과소 산정

5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최수진 부장판사)는 울산의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M사에서 일하다 뇌출혈로 숨진 A(사망 당시 42세)씨의 배우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2009년 입사한 A씨는 회사 부산지점에서 총무·경리와 생산관리 업무 등을 담당했다. 10년 넘게 근속했지만, 2019년께 터진 횡령 사건이 과로로 내몰았다. 울산 본사의 경영지원팀 차장 B씨가 회삿돈 약 153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B씨가 퇴사 처리되자 A씨는 10월께부터 B씨 업무 전체를 떠맡게 됐다. 게다가 회사가 B씨를 고소한 사건에서 경찰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는 업무도 담당했다. 회사는 신입직원을 채용해 A씨를 보조하도록 했지만, 신입직원의 업무 미숙으로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계기가 됐다. 실제 신입직원 채용 이후 해외 거래에서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A씨는 5개월여간 버텼지만 끝내 사달이 났다. 2020년 3월23일 부산지점으로 출근했다가 울산 본사로 이동해 횡령 관련 내용을 대표에게 보고한 뒤 오후 5시40분께 퇴근하기 위해 자가용을 몰고 주차장을 나오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인한 뇌간 압박으로 숨졌다. A씨 배우자는 업무상 재해라며 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그러나 ‘불명확한 업무시간 기록’이 발목을 잡았다. 최상위 관리자였던 A씨는 포괄임금제(연장근무 월 52시간·휴일특근 월 32시간)가 적용됐다. 사측은 “A씨가 본인 책임하에 근태를 관리해 정확한 출퇴근시간을 확인할 자료가 없다”고 회신했다. A씨의 근무시간이 고용노동부 고시가 정한 과로 기준인 발병 전 4주와 1주 평균 업무시간(각각 64시간과 60시간)에 속하는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사장·동료 나서 진술, 법원 “실제 근무 길어”

공단은 결국 기본 근무시간인 하루 8시간과 주당 40시간을 토대로 발병 전 주당 근무시간을 1주간 40시간, 4주간 38시간, 12주간 35시간2분으로 산정했다. 이를 전제로 단기·만성과로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부지급 결정을 내렸다. 기저질환(섬유근성 이형성증)도 근거로 삼았다. 유족은 “공단이 업무시간을 과소평가해 1주 40시간으로 가정했다”며 2021년 8월 소송을 냈다.

법원은 유족 손을 들어줬다. A씨 근무시간은 공단이 산정한 시간보다 길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재판부는 “사업주와 동료의 진술을 통해 고인이 야간·휴일 근무, 재택근무를 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실제 회사 대표는 “주말에 (고인과) 계좌를 나눠 횡령액을 파악했다”고 진술했고, 회사 전무는 “고인이 20년 이상에 걸친 자료를 전수 조사해 횡령 사건을 조사했다”고 증언했다. SNS에도 고충이 드러났다. A씨는 “어제 8시쯤 퇴근했다가 심장마비 올 뻔했다” “3일 연장 노가다했더니 온몸이 아우성을 떤다” 등 내용을 동료에게 하소연했다.

재판부는 A씨가 최소 3개월 이상 과로에 놓였을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B씨로부터 범행을 은폐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등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장기간 감내하기 어려운 정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 왔고, 그럼에도 충분한 휴식을 취해 회복할 기회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고인의 SNS 대화 기록과 업무 자료를 활용해 업무량과 강도를 입증했다”며 “이를 근거로 법원이 기록되지 않은 다수의 초과근로가 있었을 개연성이 크고 횡령 사건 처리 과정에서 업무량이 급증했음을 인정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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