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2020년 12월부터 4년에 걸쳐 격주로 <매일노동뉴스>에 써 왔다. 그 이후 70여 차례에 걸친 필자의 글은 모두 시대에 맞는 노조의 개념설계를 위한 것이었다. 현장경험을 되새겨 써 온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두 개의 그림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림은 노동·노조·노사관계를 보는 세 가지 시각에서 뻗어 나오는 것들을 설명하는 ‘유니온 트리(노조나무)’다. 일하는 시민이 권리 주인이 되는 일반적인 주체화 양식은 노조다. 시민이 주권자가 되는 방식은 투표해서 선출된 정치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간접적 방식과 함께 결사체를 만들어 목소리를 내는 직접적 방식이 있다. 이 중에 일하는 시민들의 직접적 권리행사는 노조라는 결사체를 통해 요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다. 노동시민 결사체가 노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가 가입해 활동하는 단체는 노조다. 때문에 노조에 대한 개념을 시대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좋은 노조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큰 힘이다.

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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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제는 3개다. 나와 나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문제는 기후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기울어진 사회적 관계는 양극화의 문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결국 나와 나의 관계다. 내가 나를 문제의 피해자로만 볼 것인지, 혹은 문제를 부정하는 수혜자인지, 아니면 문제의 해결 주체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노동문제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노동을 어떻게 보는가가 출발이다.

1980년대에 폭발하면서 1990대까지 혁명적 노동계급론이 한국 노동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면 ‘자아 비대증’에 가까웠다. 상황을 바꾼 것은 외환위기다. 세계를 바꿀 위대한 노동계급은 내 일자리를 지키려는 밥그릇 싸움인 생존권 수준으로 후퇴했다. ‘자아 비대증’에 대비한다면 ‘자아 왜소증’에 빠진 것이다. 우월감으로 자아가 비대할 때는 자신을 역사의 주인으로서 여기며 국가권력까지 장악하겠다는 꿈을 꾸지만, 열등감으로 자아가 왜소해진 상태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상상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비대하지도 왜소하지도 않은 균형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과 노동을 존중하며 비대와 왜소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때 다른 동료시민과 연대하면서 비전을 열어 갈 것이다.

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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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림은 기후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경제학을 열어 가려는 노력의 하나로 등장한 ‘도넛경제학’에서 따온 것이다. 도넛 경계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부족을 의미하며 도넛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은 과잉을 의미한다. 도넛 안쪽에 있는 상태가 적정한 균형을 이룬 상태다. 나무그림에서 설명하는 것을 도넛으로 옮겨 표현했다.

노조관을 보면, 노조를 이익단체로 여기는 것은 권리의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권력집단으로 여기는 것은 권리의식을 넘어서 과도함을 의미한다. 노조를 이익단체로 생각하는 조합원은 계산적이고 노조를 권력집단으로 생각할 때 노조 안에 파벌을 만들어 정치화되는 경향이 있다. 노조를 권리 결사체로 여기는 것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이다. 노사관을 보면, 노사를 하나로 생각하면 독립성을 잃고 어용노조가 된다. 반대로 사용자를 적으로 보면 과격한 투쟁으로 인해 노동자와 시민이 기피하게 되고 때로는 극심한 갈등으로 기업이 산업을 이탈해 사라질 수도 있다. 노사는 서로 다르기에 갈등하면서 타협한다. 이런 역동적 관계를 통해 불평등을 지양하는 것이 적절한 길이다.

노조의 개념을 나무만이 아니라 도넛으로 표현한 것은 기성노조에 대한 성찰과 기후위기라는 인류에게 다가온 중대한 위험을 고려한 것이다. 노조는 이윤을 위한 기업체와 달리 노동권이라는 권리 중심 결사체다. 그런데 노조는 기업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했을까. 기성노조들은 더 많은 일감을 가져야 일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성장주의, 기업이 살아야 노조가 산다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1990년대 초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노동해방의 꿈이 사그라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로 고용빙하기를 맞는 노동계급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성장주의는 내 고용을 위해 물량에 집착하게 만들어 물량나눔과 고용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 지구적 차원에서 노사가 공유한 성장주의는 자연에 대한 착취와 수탈로 기후재난을 낳았다. 이제 새로운 노동윤리가 필요하다. 만물을 노동이 창조한다는 19세기에 확산하기 시작했던 ‘노동창조론’, 20세기 말에 급속히 확산한 ‘노동종말론’을 넘어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적정노동론’이다. 무조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탄소를 줄이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늘리고 탄소를 배출하는 노동을 최대한 줄이는 ‘탈성장-선택적 고용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발상은 컨베이어가 깔린 전통적 공장을 넘어선 플랫폼이 깔린 소셜팩토리(사회공장)에서 탄생한 노동에서 더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두 그림의 의미를 짧은 설명으로 대신할 수 없다. 70여 차례 칼럼을 다 기억하는 독자도 없을 것이다. 책으로 출판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기회를 주신 매일노동뉴스와 읽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다음부터는 현장 인터뷰를 중심으로 칼럼을 쓸 계획이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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