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흡 한반도메밀순례단장

진부면 ‘곶은골’에서 태어나 봉평 창동리 계모 밑에서 자란 이효석은 100리 떨어진 평창에서 하숙을 하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유학한 이효석에겐 고향에 대한 향수가 컸고 그 그리움이 ‘메밀꽃 필 무렵’을 낳았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봉평은 그렇게 메밀의 상징이 됐다.

메밀은 단메밀과 쓴메밀이 있다. 봉평은 상징일뿐 우리나라 메밀 생산은 제주가 본산이다. 제주산 메밀도 전체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국내 소비량의 대부분은 중국산 메밀이다. 최근 제주에서 쓴메밀(타타리메밀)이 재배되고 있다. 쓴메밀은 최소 4천년 동안 재배됐는데 우선희 충북대 교수(식물자원학)가 최근 전 세계 510개 유전자원을 이용, 쓴메밀 게놈지도를 작성하는데 성공했다. 히말라야 지역이 쓴메밀의 원산지로 확인됐고 필수아미노산, 저항성 녹말, 루틴, 퀴르세틴 등 몸에 좋은 생체활성 플라보노이드를 함유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단메밀보다 70배 정도 루틴 함량이 많다.

“봉평의 오봉순” 2000년 5월부터 24년간 메밀을 공부하며 쓴메밀로 메밀면의 새로운 세계를 연 선구자다. 당대를 이끄는 메밀 음식의 맛과 멋을 창조한 ‘미가연’ 오숙희 주인장의 별칭. 쓴메밀 음식 관련 세계 최초 특허, 2017년 대한민국 메밀요리 1호 명인, 2020년 세계명인 메밀 분야 월드마스터…. 이어지는 명예로움은 혁신의 결과다. 메밀면의 점성을 확보하기 위해 ‘익반죽’(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손으로 반죽)을 하는 곳이 많은데 쓴메밀 가루와 함께 얼음을 넣고 기계로 반죽한다. ‘100% 쓴메밀면’과 ‘20% 쓴메밀 80% 단메밀의 2대8 100% 메밀면’을 바탕으로 한 여러 메밀국수가 있다. 소면과 중면 사이 굵기의 메밀면은 특유의 꼬들꼬들함이 살아 있고 목 넘김이 매끄럽다. 메밀 싹, 들깨가루, 김 가루가 올라 온다. 메밀 싹은 노란색과 빨간색 두 가지가 있다. 노란색 메밀 싹은 이틀 발아하고 닷새간 키운다. 빨간색 메밀싹은 이틀 발아하고 나흘간 광합성 한다. 메밀 싹은 7일간 키웠을 때 루틴 함량이 가장 높다. 메밀 싹에는 메밀보다 27배 많은 루틴이 있다. 고명으로 올린 메밀 싹은 루틴의 보물창고인 셈. 신선한 부드러움은 덤이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메밀 싹 고명의 선조 격. ‘육회비빔국수’에는 양념 강한 육회가 꾸미로 오른다. 대관령 한우와 메밀면의 낯선 만남이다. 동·식물단백질의 영양학적 향연이 펼쳐진다. 메밀 음식의 고급화를 꾀한 주인장의 실험 정신이 낳은 결과이니만큼 호불호가 갈린다. 미가연 따라 하기 메밀음식점이 전국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육수를 “육장”이라 부른다. 무, 양파, 레몬, 사과, 배, 간장, 대관령 한우 양지와 황태, 동치미, 3년 숙성 매실청…. 며칠간 졸인다고 한다. 조금 마셔 볼 것을 권유받는다. 육수에 면을 찍어 먹고, 육수를 면에 부어 먹는다. 취향에 따른다. 육장은 짜지 않고 은은하게 달다. 기본 찬은 초절임 무채, 궁채 장아찌, 양배추김치. 아삭한 식감이 메밀면과 잘 어울린다. 철마다 밑반찬이 바뀐다. 궁채 장아찌에는 마늘종(마늘의 꽃줄기), 청양고추도 함께 섞는다. 들기름 골동면인 미가면과 어울린다. 테이블에 놓인 다시마 식초를 면에 조금 부으면 새콤한 도시의 맛이 튀어 오른다. 파스텔톤의 묵직한 도자기 그릇. 정갈하고 고급스럽다. 시각은 음식을 접하는 최초의 감각. 단번에 사로잡는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 교감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도자기에 담아낸 메밀 음식은 오감 만족과 함께 아름다운 품격까지 누리게 한다. 손님이 누리는 호사 뒤에 남겨진 설거지의 수고로운 노동에 고마움을 표한다.

식후에 메밀싹 주스를 마시면 좋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마련한 미학적 토양 위에 메밀 음식 혁신의 대표 주자로 ‘미가연’이 서 있다. “고향 없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때때로 서글프게 뼈를 에이게 했다”. 상실감으로 위안이 필요할 때 이효석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 선재길을 걷고 봉평 오봉순의 메밀 음식을 찾아간다.

 

한반도메밀순례단장 (pshstar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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