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은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
고태은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

영화 <울산의 별>의 주인공은 산재로 사망한 남편 대신 조선소 용접공으로 일했던 윤화다. 그녀는 20년간 이 일터에서 일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를 ‘윤화씨’보단 ‘형수’라고 부른다. 그녀가 몇 번이고, ‘왜 아직도 형수라 부르냐’고 따지듯 물어도 그녀는 그저 ‘형수’다. 윤화의 이 질문은 정말 의도가 궁금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20년간 몸 바쳐 일한 일터에서 왜 자신은 여전히 죽은 남편의 대체재일 뿐인지를 묻는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번번이 ‘형수’라는 말에 분노하는 모습은 일터에서 소외받는 윤화의 처지를 보여준다.

집에서의 윤화 모습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노동력을 팔아 언제 돈을 모으겠냐며, 금융자본주의에 찬사를 보내던 아들 세진은 엄마의 삶을 무시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뷰티스쿨에 가고 싶다던 딸 경희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 말이 없어진다. 남편의 ‘목숨값’으로 마련한 집은 아들이 사기를 당하면서 저당잡히고, 와중에 작은아버지는 지켜야만 한다던 문중 땅을 팔자며 윤화를 설득하러 온다. 남편의 죽음으로 생활이 어렵던 윤화에게는 ‘남편 잡아먹은’ 사람이라며 내어줄 수 없던 그 문중 땅을 말이다. 용접을 하다 산재를 입고,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윤화에게 가정도 편안한 공간은 아니다. 여전한 긴장과 끊임없는 다툼이 이어지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영화 <울산의 별> 포스터.

영화는 중년의 여성노동자이자, 가장인 윤화를 내내 화가 나 있고, 억척스러우며, 때로는 억지스러운 사람으로 그린다. 그러나 그녀가 본래 그런 사람이라서는 아니라는 듯, 젊은 시절 가족사진 속 온화한 미소의 윤화와 대비시킨다. 러닝타임 내내 현실적이고도 숨 막히는 윤화와 가족들의 삶의 이야기는 보는 이까지도 견디기 힘들게 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마냥 어둡고,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윤화와 그 가족의 이야기들 따라가다 보면, ‘살아낸다’는 역동을 느끼게 된다. 그 힘을 생활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납작하다. 그리고 영화는 이 힘의 원천을 두 가지 맥락에서 그려내고 있다.

윤화는 자신이 조선소 용접공이고, 그것이 자랑스럽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내내 그 이야기를 잠잠히 그려낸다. 그녀는 죽은 남편을 대신해 조선소에서 일하게 된, 대체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자였다. 모두가 그녀를 ‘형수’라 불러도, 그녀를 살게 했던 것은 한때 대한민국을 먹여 살렸던, 울산에서 가장 큰 조선소 노동자라는 자부심이었다. 그것이 몸이 다 상한 지금,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고되고 싶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의 맥락은 ‘호의’와 ‘사랑’이다. 이 영화는 악역을 두지 않는다. 아들 세진과 딸 경희도 어딘가 있을 법한 이들이고, 문중 땅을 달라고 온 작은아버지와 그의 아들 인혁도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들로 나온다. 심지어 회사에서 윤화를 쫓아내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민 또한 저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윤화에 대한 저마다의 호의와 사랑을 표한다. 윤화에 대한 이들의 애정과 미안함은 어딘가 닮아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거나,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윤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그렇게 서툰 몸짓으로 삶의 무게를 버텨 낸다.

이 영화는 여성 가장으로서 윤화가 겪는 고충뿐만 아니라, 몸이 닳을 때까지 쓰이고 버림받는 노동자의 삶을 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울산이라는 지역의 현실도 중요한 맥락에서 그려지고 있다. 영화 속 울산 밤하늘에는 별이 뜨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하늘 장면에 드높은 크레인이 보인다. 조선소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렸단 말에 가려진, 도시와 가족을 먹여 살린 여성노동자. 수많은 ‘윤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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