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운 공인노무사(서울노동권익센터)

나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자’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 이후에서야 내가 사실상 ‘기간제 근로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서울시 민간위탁기관으로, 3년에 한 번씩 수탁업체를 서울시가 심사하는데, 수탁업체가 변경되면 기존 업체와의 근로계약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설사 바뀐 업체로 고용승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근로계약의 상대방이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혼란이 야기되는지 직접 겪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2024년 1월1일부로 서울노동권익센터 운영사업의 수탁기관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한국노총 서울본부로 변경됐다”는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성탄절 연휴 바로 전날, 직무기술서를 제출하라는 갑작스러운 지시를 선물로 받았다. 수탁기관 변경에 일체 책임 없는 노동자로선 퇴사 후 재채용 절차를 거치는 것 자체가 부당한데, 내가 일할 직무나 부서, 사업, 조직도를 전혀 모른 채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는, 기괴한 채용절차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전원 고용승계 보장도 없기에 새 사용자(한국노총)나 실제 사용자(서울시)의 구상에 따라 누군가는 채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서류를 낸 사람들은 모두 재채용됐으나, 서류를 내지 않고 퇴사를 결정한 관리자와 직원 12명은 승계되지 않았다. 서울시와 수탁기관은 이 빈자리 상당수를 채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인원감축을 통한 예산삭감”이라는 서울시의 1차 목표는 수탁기관 변경과정에서의 자발적인 집단퇴사를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됐다.

서울시의 공공예산 삭감목표는 센터노동자들이 새 수탁기관과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도 촘촘히 반영될 예정이다. 형식적으로는 퇴사 후 신규계약하는 것이므로 기존에 적용하던 근로조건보다 불리하게 변경해도 법적 리스크가 낮다는 걸 활용해 계약의 내용을 개악하는 과정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인 임금부터 삭감할 징조가 있었으나, 서울시를 상대로 한 노조의 대응으로 임금삭감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월 급여일까지 미뤄지던 근로계약서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고조됐다. 노동자에게 불리한 계약 내용으로 작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1월 내내 근로를 제공한 점에서 이미 실질적인 근로관계가 성립했으므로 정당한 이유를 들어 계약서 작성을 거부했다는 것만으로 해고한다면 이는 부당해고다. 따라서 노동자는 기존 계약보다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이니 작성을 유보할 수 있는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근로제공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거나, 일단 작성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법적 대응을 하라는 등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듣기도 했다. 이는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자발적 퇴사를 유도하는 상황의 연장선이고, 서울시의 인원감축 계획에 충족하는 일이다.

특히 서울노동권익센터의 이동노동자쉼터 4곳(북창, 합정, 서초, 셔틀) 노동자들에게 제시된 근로계약서는 사측의 인사권만을 과도하게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계약서와 달리, 근무장소를 특정하지 않았고, 출퇴근시간 및 휴게시간을 사측이 통보하는 스케줄표에 따른다고 명시했다. 출퇴근시간이 유동적인 사업장이 아닌데도, 중요한 근로조건인 근로시간을 특정하지 않은 것은 노동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다.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주·야간 근무시간 변경, 순환배치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렇게 인사권을 최대한 넓게 보장해 놓고, 향후 서울시 결정에 따라 쉼터 사업을 축소할 경우 더 손쉽게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첫 삽을 뜬 것으로 판단된다.

이 모든 문제는 원청 서울시가 만들었다. 지난해 말, 법적 사용자와 노조 간 어떠한 대화도 시작되지 않은 마당에 서울시는 연차휴가미사용수당과 퇴직금을 정산해 지급하고, 4대보험상실신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근로조건을 포괄적으로 승계하도록 노력할 여지가 있음에도, 이미 답을 내린 확고한 입장이었다. 노조는 서울시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 입장을 요구했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취약노동자를 지원하는 사업의 성과는 “약자와의 동행” 운운하며 서울시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는 원청사용자로서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시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민간위탁 구조에서는 어떤 수탁기관이 선정되더라도, 센터노동자에게 닥치는 대혼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어차피 원청 서울시의 입맛대로 하청 수탁기관은 다시 변경될 수 있고, 이 과정에 개입 가능성이 차단된 센터노동자들은 그때마다 흔들리며 피해를 볼 것이다. 실제 근로조건이 저하돼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내가 맡은 사업과 직무가 이어질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업을 계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사업의 안정적인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센터가 흔들리는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사업의 대상인 시민들이라는 점에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다.

서울시가 위탁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면 노동조합과 교섭할 의무도 부담해야 한다.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좌초된 노란봉투법이 필요한 이유고, 원청사용자를 향한 투쟁이 더 크게 일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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