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

아픈 몸 노동권이라니,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는 뜻인가요?

10년 전 질병권과 아픈 몸 노동권에 대한 강의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혹스러운 표정도 상당했다. 당시만 해도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이들의 노동권에 대한 논의 자체가 희박했으니 무척 낯설었을 것이다.

특히 노동자 건강권에 관심이 많다는 한 노조 활동가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럴만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일터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강조해 왔고, 아프면 충분히 치료받으며 유급 휴가나 산재 보상 등으로 생계를 보전받을 수 있도록 투쟁해 왔다. 그런데 아픈 몸 노동권이라니! 아파도 쉼 없이 노동할 것을 강요하는 자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오랫동안 질병권(잘 아플 권리)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질병권에서 아픈 몸 노동권은 필수 조건이다. 우선 질병권을 아주 간략히 보자. 질병권은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을 이동시킨 개념이다. 질병권에서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저임금, 성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는 일상,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과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현실 등은 모두 건강을 직접적으로 손상시키는 ‘독성물질’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자주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망각하는 또 하나 현실은 인간의 전체 생애 주기 중에서, 건강하고 굳건한 신체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물론 건강하다는 단어가 평생 자기 삶과 무관하다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인간 생의 상당 부분은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취약하거나 아픈 상태로 지낸다. 그래서 질병권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히 노동해도 결코 아프지 않은 몸이 아니라, 생로병사를 잘 겪을 수 있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아가다가 가볍지 않은 질병을 겪게 되면, 질병이 곧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거나 여러 불안에 잠식된 일상을 사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취급하는 것 같고, 자아 정체감은 손상된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다른몸들의 활동가이자 조현병과 살고 있는 박목우님은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잠이 쏟아져 간단한 문서 작성을 할 수도 없고, 강박 때문에 몸을 움직여 물건을 정리할 수도 없고, 설거지조차 물소리가 말을 거는 환청으로 들려 할 수 없는 그런 몸들…… 그런 몸들은 쓸모없는 몸으로 버려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쓰레기로 분류되어 시설에 수용되거나 아니라면 가족에게조차 부담만 주는 존재로 여겨져 무시당하고 침묵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픈 몸 무대에 서다> 다른몸들 기획, 오월의 봄 펴냄)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삶의 통제권을 상당 부분 손상 당했을 때, 자신의 삶을 조절할 수 있다는 감각 회복이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은 주요한 요소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아픈 몸들은 아프기 때문에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만, 아프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배제된다.

이는 아프기 때문에 필연인 게 아니라, 노동시장이 젊고 ‘건강한 몸’만을 전제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자,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며 ‘쓸모’를 입증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또한 병원에서도 적절한 노동은 질병 치료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아픈 몸 노동권은 우리의 ‘쓸모’를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건강과 노동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 사회, 이윤에 기여하는 ‘건강한 몸’만을 ‘표준’으로 두고 그 이외의 존재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며 사회 밖으로 쫓아내 온 자본주의 사회. 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기와 균열로서 아픈 몸 노동권에 주목한다. 아픈 몸 노동권은 뜨거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다른몸들 대표 (iingmod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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