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서울 구로지역 노조연대투쟁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은 종업원이 2천여명 되는 대우그룹의 의류봉제 수출회사로서 노동자들의 하루평균 임금이 2천850원 정도로 낮았다. 작업장 환경은 월평균 80~100시간의 잔업에 겨울철 동상환자가 속출할 정도로 열악했고 현장 노동자들은 극심한 관리직과의 차별대우 아래 신음했다.

이러한 열악한 근로조건을 극복하고자 노동자 105명은 1984년 6월7일 노조를 결성했고 조합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85년 임금교섭에서 문제가 생겼다. 회사측이 임금인상 외에 여름 보너스 2만원을 추가로 지급하는 양보를 하면서 40일여간의 임금교섭이 마무리됐는데 교섭이 끝난 후인 그해 6월22일 서울남부경찰서에서 임금인상투쟁 때 두 차례 철야농성을 했다는 이유로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 등 3명을 연행해 구속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100여명의 조합원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회사 총무과에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며 파업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가리봉전자노조·효성물산노조·선일섬유노조 간부들은 23일 대책회의를 열어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이 노조들은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의 구속이 민주노조 각개격파를 위한 신호탄이라는 인식하에 70년대 민주노조 파괴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연대투쟁에 돌입했다.

구로지역 노조연대투쟁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6월24일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명이 “회사는 노동자의 피와 고름을 빼먹고 살찌워 가려는 결코 우리와 타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며 무기한 파업농성 돌입을 선언한다.

② 그날 오후 2시 효성물산노조원 400명이 파업농성에 돌입해 마주 보는 건물에 위치한 대우어패럴노조원들과 손을 흔들고 서로의 힘을 북돋워 준다.

③ 가리봉전자노조 구로공장·독산공장 조합원 500명과 선일섬유노조도 같은날 오후 2시에 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배포된 ‘노동조합 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에는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 등을 비롯한 구속자 전원 석방, 민주노조운동을 짓밟는 악법철폐, 부당해고자 전원복직, 정책적인 어용노조 설립 즉각 중단, 노동부 장관 사퇴” 같은 정치적 투쟁사항이 담겨 있었다.

④ 6월25일 연대투쟁은 인근에 있는 남성전기·세진전자·롬코리아 노조로 확산됐다. 이날 구로공단 주변과 주택가에는 6월26일 오후 8시30분 가리봉 5거리에 총집결해 전두환 정권의 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가질 것을 제의하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 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는 제목의 유인물이 다량 살포됐다.

⑤ 파업 3일째인 6월26일 대우어패럴 농성 노동자 9명이 허기와 갈증으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가는 등 실신자가 속출했고 22개 단체 50명이 구로연대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 들어가 농성했으며 6월27일에는 기독교회관, 가톨릭 노동청년회 등이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점거농성을 했다.

구로연대투쟁은 6일 만에 막을 내렸고 연대투쟁에 참가한 노조는 10개에 2천500여명이었다. 또한 청년·학생·재야단체 등 운동세력들은 성명·농성·가두시위를 벌여 투쟁 과정에서 43명이 구속되고 18명이 불구속입건, 47명이 구류를 받았다. 700명 넘는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했다.

1985년 6월의 구로연대투쟁은 세 가지 의미에서 연대투쟁이었다. 첫째 그것은 구로공단과 그 인근지역의 여러 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낸 기업 간 연대투쟁이었고, 둘째 이 투쟁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노동자·학생·반정부집단들 사이의 연대투쟁이었다. 셋째, 구로연대투쟁은 다른 부문의 민중운동에 각성을 촉구하면서 민중운동 내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다 분명히 하여 노동운동을 경제적인 투쟁으로 파악하는 시각, 즉 단지 부문운동으로만 파악하는 시각 등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 투쟁이었다.

즉 구로연대투쟁은 산업지역에 있는 조합원들 사이에서 발전된 긴밀한 사회적 연계에 기초한 최초의 기업 간 연대투쟁이었다. 그리고 구로연대투쟁에서 나타난 유인물의 내용을 통해 볼 때, 파업이 경제적 불만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에 가해진 정치적 억압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이 주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이러한 점에서 구로연대투쟁은 한국노동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그리고 구로연대투쟁은 다가올 노동계급운동의 전조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투쟁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현대는 한국에서 가장 큰 재벌그룹이며 가장 큰 자동차공장과 조선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산업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그룹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노동운동의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1990년 1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5대 노조 집행부를 선출했다. 노조측은 새로 당선된 노조위원장 취임 축하모임을 근무시간에 하겠다고 회사에 요구했고 회사측이 거절함에 따라 갈등이 일어났다. 한편 새로 당선된 노조지도부는 128일간의 파업으로 구속된 노조지도자들의 법원심리에 참여하기 위해 조기 퇴근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회사측은 신고로 들이닥친 경찰은 노조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구속된 노조지도자들에게 중형이 선고되자 노조측은 파업을 결정했다. 당시 노조는 발간한 신문속보에 “금번 투쟁은 현대중공업 노조만의 싸움이 아니라 2천500만 노동자의 의리와 자존심을 건 독재정권과의 한판 싸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저항한다. 파업 결정 후 노조는 심각한 지도자 공백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갑용이 책임을 맡게 되고 골리앗투쟁을 시작했다.

진압경찰의 기습이 임박했을 때 78명의 파업지도자들이 지상 82미터 위의 거대한 골리앗크레인으로 올라갔고 그해 4월28일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이 시작됐다. 한국의 전투적인 노동단체들은 이 투쟁을 억압적인 국가와 자본가를 상대로 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으로 봤고 5월4일 전국적으로 약 146개 사업장 12만명의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총파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지지파업은 며칠 지속되지 못했고 외부지원이 약화되자 시가전도 수그러들었으며 골리앗 위의 핵심멤버들은 고립돼 5월10일 마침내 투항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들에게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자각과 함께 투쟁의 승리감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체험은 노동자계급에게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계급정체성을 형성시킴으로써 권위주의적 노동통제체제에 대한 전면공격으로 발전해 가기에 이르렀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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