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착하게 보이는 말

‘약자’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나오고 시내버스 ‘교통 약자’ 좌석 표시에도 있다. 서울시는 “약자와의 동행”을 말해왔다. 작년 말, 대통령은 14개 기부·나눔 단체를 초청해 “사회적 약자 지원 약속”을 했다. 국무총리는 쪽방촌을 방문해 “사회적 약자를 두텁게 지원”하겠다고 했다.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되자 기재부는 “재정건전성의 개선뿐만 아니라, 서민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이 증액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약자를 겨냥한 공약이 부쩍 늘어난다. 늘 이어진 약자 타령은 심지어 ‘약자남성론’으로 이어진다. 약함이나 실패를 포용하지 않는 남성문화와 남성 내부 격차를 보지 않은 채 남자 모두를 다수자로 여기는 페미니즘 모두에게 버림받은 남자들이 약자라고 한다. 약자를 옹호하는 좌파도 가난한 남성 노동자 계급을 무시하는 ‘정체성 정치’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

약자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악의가 아닌 선의로 말한다. 그러면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착한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쳐 양극화에 이르렀다. 양극화란 시민이 강자와 약자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약자라는 말은 많은데 현실은 왜 바뀌지 않을까. 약자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결국 자신을 착한 것처럼 꾸미는 말(레토릭)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약자라고 부르지 마요

따스하고 예쁜 빵을 만드는 제빵기술자의 꿈으로 취직했지만 쉽지 않은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제빵 노동자 처지를 ‘빵셔틀’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러자 제빵기사가 말했다. “우리끼리 노예라는 단어를 쓰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노예라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가슴이 뜨끔했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쓴 말이 당사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프리랜서는 한마디로 가짜입니다”. 노동권을 적용받지 못하는 프리랜서에 대한 토론에서 들었다. 다른 의견이 이어졌다. 숨 막힐 것 같은 기업의 조직문화를 벗어나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노동을 즐기는 이에게 “당신은 가짜다”고 하면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넌 약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려운 처지를 드러내려는 선한 의지와 무관하게 그것이 존재를 비하할 수 있다. 비참해야 공감하고, 처절해야 들여다보고, 위험에 처해야만 연대가 시작될까. 그래서 더 비참하고 더 처절하며 더 위험한 모습을 보여야 할까. 그러다 존재 자체를 비참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더 위험하고 비참하고 처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동료 시민이기에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하지 않나.

차별하려면 구별한다. 서로를 동료시민으로 생각한다면 차별하고 혐오하고 지배할 수 없다. 왕족은 하늘의 계시를 받거나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고대 신화와 같은 ‘뻥’, 혈통과 가문을 나누던 중세 신분제의 ‘피’, 재산으로 계급을 구분하는 자본주의의 ‘돈’, 여기에 추가된 시험성적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는 능력주의의 ‘등’이 모두 구별짓기다. 구별짓기는 차별장치다. 타인 차별은 언제나 자기 특권을 위한 것이다.

약자다움과 심리적 격차

강자와 약자로 나누는 것도 구별짓기가 된다. 약자라는 말을 쓰는 이들이 약자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약자 대변’은 약자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내겠다는 것이다. 약자는 스스로 말할 수 없을까. ‘약자 보호’는 약자를 다른 사람이 지키겠다는 것이다. 약자는 스스로 지킬 수 없을까. 스스로 말하게 하기보다 대신 말하고 스스로 지키게 하기보다 대신 지키면 약자는 주체가 아닌 보호 대상이 된다. 의존해야 하는 삶은 독립이 어렵다. 약자는 영원히 약자로 남는다.

그들은 약자다움을 요구한다. 내가 너희를 대변할 테니 닥치고 투표하고, 내가 너희를 보호할 테니 감사하라고 한다. 닥치고 감사하지 않고 뭉치고 요구하면 대변도 보호도 필요 없다. 그것은 대변하고 보호하면서 자기 지위를 유지해 온 특권층의 할 일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특권 자체를 흔든다. 그들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과 상실의 두려움으로 나약한 자신을 감춘 채 약자의 자력화(주체화)를 경계한다.

보호 대상이 된 약자의 자존감은 박탈당한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세계에서 차이를 소득격차로 환산해 양극화도 물질적인 ‘먹고사니즘’으로 보는 습관이 강하다. 굶어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통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열등, 허무, 절망감으로 인한 자살은 개인적 자살을 넘어 국가의 자멸과 맞닿아 있다. 빈부격차나 양극화는 ‘심리적 격차’로 이어진다. 불평등 해결도 당사자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심리적 격차는 이런 에너지를 제거한다.

공기관이나 공공기금이 진행하는 공모사업에서 자력화보다 자신의 약자 지원 실적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에 둘 때 불편하다. 기부, 봉사, 사회공헌도 자신의 선의를 자랑하는 활동인 경우가 있다. 자신을 숨기는 기부도 있지만 자기 광고를 위한 경우가 그렇다. 연대를 열심히 하는 사회 활동가 중에서도 당사자보다는 자기 광고에 치중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연대가 필요한 당사자보다 자신이 중심에 있다. 자신을 알리려는 이기적 욕망이 이타적 결과를 만들면 고맙지만, 이런 연대는 이기적이다.

소명으로서 주체화 양식

용도에 따라 양식이 다른 문서처럼 활동이나 일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인 ‘양식(樣式)’이 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이익 주체가 되는 양식은 기업이다. 시민 지지를 끌어들여 권력 주체가 되는 양식은 정당이다. 서로 뭉쳐서 권리 주체가 되는 양식은 시민 결사체다. 기업가는 사람들에게 이익 경쟁에 뛰어들게 하고, 정치가는 사람들을 권력 경쟁으로 끌어들이며, 단체와 노조 활동가는 권리를 위해 서로 곁이 되게 한다.

노동시민 결사체로서 노조는 직업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다. 직업은 돈벌이 관계다. 산업과 기업이 만든 영토다. 그곳엔 산업의 규칙, 기업의 지시, 직업적 관행이 있다. 그 땅에서 우린 주인이 아닌 자원이다. 그곳을 장악한 이익 욕망을 벗어나 권리를 앞세운 새로운 가치로 뭉치면 결사체가 된다. 물질적 기반과 가치지향 등으로 이뤄지는 주체화 양식은 그들이 주도하는 영토 위에 우리가 주도하는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모인다고 다 결사체일까. 영세중소사업체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는 조직을 만들어도 기능하기 어려울 수 있다. 노동의 특징을 잘 살린 주체화 양식이 필요하다. 활동가를 만나보면, 권리를 위한 활동을 하는지 이익을 위해 영업을 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가는 대변하는 것이 직업이지만, 조합원이나 회원 직접행동이 중요한 결사체에 어울리지 않게 대변자가 되려는 활동가도 있다. 이익단체나 권력단체로 퇴행한 기성 조직을 새롭게 고치기 위해서도 적합한 주체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기술권력이 커진 시대에 시민 자력화는 활동가의 소명이다. 대변하는 사람은 말발을 키우고 자력화하는 사람은 관계를 키운다. 약자로 퉁칠 수 없는 다양한 시민의 자력화가 미약해 기술권력을 쥔 자본운동은 거세고, 혐오와 적대 정치가 난무한다. 이를 넘어설 사회운동은 주체화 양식을 개척하고 개발하는 활동가를 원한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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