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지난 11일 서울고법이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고인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게 1심의 무죄 판결을 뒤집고 유죄를 선고했다. 공식 사망자만 최소 1천258명이고, 사건이 공론화된 지 1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2018년 유죄가 확정된 옥시의 전 대표는 이미 형기를 마쳤다. ‘내 몸이 증거’라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외침은 ‘뒤늦은 정의’에 허탈하다.

한겨레는 다음날 ‘가습기 살균제 SK케미칼·애경 항소심선 유죄’라는 1면 기사에 이어 5면 모두 할애해 ‘내 몸이 증거, 13년 호소 끝에… 모든 가해 기업들 책임 인정’이란 해설기사를 실었다. 그 아래엔 “숱한 사람 죽인 죗값이 금고 4년이라니…”라는 절규를 담아 피해자들 목소리를 담은 별도 기사를 썼다. 피해자들은 두 기업의 유죄 선고에 안도하면서도 금고 4년이란 낮은 형량엔 “납득이 안 된다”며 반발했다.

한국일보는 같은 날 “국민 상대로 독성 시험을 했다”는 서울고법의 판결 요지를 담아 사회면(10면) 머리기사를 쓰고 ‘22년 만의 유죄… 늦었지만 의미 큰 가습기 살균제 판결’이란 사설도 썼다. 한국일보는 “해당 제품 출시 후 22년 만의 단죄”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안전검사 없이 출시”했다는 판시를 인용해 12면 머리기사를 썼다. 중앙일보는 살균제에 들어간 독성 화학물질이 폐 질환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1심 판결 뒤 학계에선 “(법원이) 전문가 연구를 틀리게 인용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공개 반발”하며 “항소심 재판부에 추가 연구 결과도 다수 제출”한 사실도 언급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회면(12면)에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대표 2심 유죄’라는 2단 기사에 이어 26면에 “전 국민 상대로 한 독성 시험”이란 제목의 논설위원 칼럼을 썼다. 동아일보는 칼럼에서 가해 기업을 향해 “하루라도 빨리 배상·보상 방안에 합의해 피해자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게 조금이나마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길”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반면 조선일보와 매일경제는 사회적 파급력이 큰 이번 판결을 1단 기사로 뭉갰다. 두 신문엔 피해자 목소리는 한 줄도 안 나온다. 참 기사 쓰기 싫었나 보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1면과 4, 5, B2면에 걸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세스)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조선일보는 기자를 13명이나 투입해 세스 특별취재팀까지 구성해 미국에 파견했다. 1면엔 ‘누구나 AI 사고파는 시대’라는 소개 기사를 싣고, 4면엔 조선일보가 취재팀 13명을 현장에 보내 신문과 TV조선, 유튜브로 세스의 모든 것을 해설하고 분석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5면엔 수학 수업과 논문 등에 AI를 활용할 수 있다며 ‘GPT 스토어’ 오픈 사실을 소개했다. B2면엔 AI 기술을 활용할 여러 산업을 소개했다. ‘병원 밖으로 나온 헬스케어’라는 제목으로 의료업 사례와 건설업과 전자산업에도 활용 가능성을 소개했다.

AI 만능주의에 젖은 이런 기사는 미래를 유토피아로 그려내지만, 기계에 인간 본성이 침해되는 여러 부작용에는 눈을 감는다.

그토록 AI와 GPT가 좋다면, 가습기 살균제 항소심 판결을 고작 1단 기사로 뭉개는 조선일보 뉴스룸부터 사람 기자를 모두 들어내고 기계로 채우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낫겠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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